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29차 청소년 주일 담화
(2014년 5월 25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제28차 세계 청년 대회의 놀라운 만남이 제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과 형제애의 위대한 축제였습니다! 코르코바두 언덕 위에 서서 멋지게 펼쳐진 코파카바나 해안을 굽어보고 있는 구세주 그리스도 상처럼 멋진 브라질 사람들이 우리를 두 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선교하는 제자가 되도록 부르심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 부르심을 인생의 가장 소중한 보화로 삼고, 우리가 이 선물을 가까이 있는 사람이든 멀리 있는 사람이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선물은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삶의 변두리에 있는 이들과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대륙 간 순례의 다음 여정은 2016년 크라쿠프에서 있을 것입니다. 이 여정을 함께 하는 방법으로 저는 앞으로 3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참행복(5,1-12)에 대하여 묵상하려고 합니다. 올해는 먼저 첫 번째 참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에서 시작할 것입니다. 2015년의 주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가 되고, 2016년에는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가 될 것입니다.


1. 참행복의 혁명적인 힘

참행복에 대하여 읽고 묵상하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기쁨을 주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처음으로 하신 위대한 가르침에서 참행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군중이 모여 들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산상 설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곳으로 여겨지며,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가르치시며 당신 자신을 거룩하신 스승, 새로운 모세로 드러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길, 당신께서 친히 걸어가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길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참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제시하십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태어나시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평생 동안 예수님께서는 참행복을 구현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모든 약속이 그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참행복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시며, 사랑의 길,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단 하나의 길을 함께 가자고 요청하십니다. 이 길이 쉬운 길은 아니지만 주님께서는 은총을 약속하시고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도전에 직면합니다. 여기에는 가난, 고난, 굴욕, 정의를 위한 투쟁, 박해, 날마다 회개하는 어려움, 거룩해지라는 부르심에 충실하려는 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을 열어 예수님을 우리 삶 안으로 들어오시게 하여 우리의 기쁨과 슬픔을 예수님과 함께 나눈다면, 우리는 오로지 무한한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은 혁명적인 새로움을 담고 있습니다. 참행복은 일반적으로 대중 매체와 지배적인 사고방식에서 말하는 것과 상반되는 행복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느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신 이들은 이 세상 논리에 따르면 쓸모없는 ‘패배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이뤄낸 성공과 부요, 오만한 권력,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며 관철하는 자기주장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삶에 대한 당신의 제안에 응답하고 참 기쁨에 이르기 위하여 어떤 길을 가고자 하는지를 결정하라고 여러분을 재촉하십니다. 이는 신앙에 대한 큰 도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다른 길을 가고 싶은지를 서슴없이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참조). 시몬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용기 있게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여러분도 예수님께 “예”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삶은 의미 있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2. 행복할 용기

“행복하여라”(그리스어로 ‘makarioi’)는 무슨 뜻입니까? 이는 ‘복되다’는 뜻입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진정 행복해지기를 원하십니까? 행복에 대한 수많은 허상에 끊임없이 빠져드는 시대에, 우리는 적은 것에 만족하고 삶의 의미에 관하여 ‘작게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고 반대로 크게 생각하십시오! 마음을 여십시오! 피에르조르조 프라사티 복자는 말했습니다. “신앙 없이 사는 것, 지켜나갈 유산 없이 사는 것, 진리를 수호하고자 끊임없이 투쟁하지 못하는 것, 이는 사는 것이 아니라 겨우 목숨만 이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만 이어가서는 안 되고, 진정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보니니[I. Bonini]에게 보내는 서한, 1925.2.27.). 피에르조르조 프라사티의 시복식 강론에서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그를 “참행복의 사람”(AAS 82 [1990], 151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열망에 진실로 마음의 문을 열면, 여러분은 행복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여러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값싼’ 제안들을 식별하고 거절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부와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고 우상화한다면, 우리는 도취 상태와 헛된 만족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그 노예가 되고 결코 만족하지 못하여 끊임없이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지치고 나약한 젊은이를 보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요한 성인은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습니다”(1요한 2,14 참조).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젊은이들은 강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양식을 얻고 다른 것들로 ‘배를 불리지’ 않습니다! 시류를 거스르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진실로 행복할 용기를 가지십시오! 덧없고 피상적이며 ‘내버리는’ 문화, 곧 여러분이 책임을 지고 삶의 커다란 도전에 맞설 능력이 없다고 치부하는 문화에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올해 청소년 주일 담화의 주제인 첫 번째 참행복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 위기로 고통 받고 있는 때에 가난과 행복을 연결하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난을 축복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먼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사람이 되셨을 때, 그분께서는 가난과 자기 비움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5-7).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벗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가난을 선택하신 것을 봅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참조).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누워 계신 구유를 바라볼 때, 그리고 그분께서 자기 비움의 절정을 보여주시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묵상하는 신비입니다.

그리스어 형용사 ‘프토코스’(ptochos)는 단순히 물질적 가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걸인’을 뜻하며 히브리어 ‘아나빔’(anawim), 곧 ‘주님의 가난한 이들’의 개념과 연관됩니다. 이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한계, 가난이라는 존재 조건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난한 이들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기 예수의 데레사 성녀가 잘 알고 있었듯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강생을 통하여 사랑을 구걸하는 걸인으로 우리 가운데에 오셨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인간은 “하느님께 비는 걸인”(2559항)이며, 기도는 하느님의 목마름과 우리 목마름의 만남이라고 합니다(2560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참행복의 비결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의 모습과 십자가에 매달리신 모습으로 말씀하실 때,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깨달았습니다. 아시시의 이 작은 형제는 기도하면서 몇 시간이고 주님께 이렇게 여쭈어보고는 하였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저는 누구입니까?”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과 결혼하고자, 예수님을 본받고 복음을 글자 그대로 충실히 따르고자 풍족하고 걱정 없는 삶을 버렸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난한 그리스도를 본받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무엇을 해야 구체적으로 우리가 마음의 가난을 삶의 방식으로, 우리 삶의 진정한 요소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물음에 저는 다음의 세 가지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물질에서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소비주의 문화에 굴복당하지 않고 검소하게 복음에 따라 살아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는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우리를 질식시키는 온갖 불필요한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소유욕을 버리고, 돈을 우상화하지 말고 또 낭비하지도 맙시다. 예수님을 으뜸 자리에 두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우상 숭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하느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을 돌보시듯(마태 6,28 참조),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방식을 바꿀 준비를 해야 하고 지나친 낭비도 피해야 합니다. 또한 행복해질 용기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검소하게 살아갈 용기도 필요합니다.

둘째, 이 참행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보살펴야 하고, 그들의 정신적 물질적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저는 젊은이 여러분에게 연대성을 인간 문화의 중심에 다시 두는 과업을 특별히 맡깁니다. 오래되고 새로운 가난의 형태들, 곧 실업, 이주, 온갖 종류의 중독에 직면하여 우리는 세심하게 살피고 늘 깨어 있어야 하며, 무관심의 유혹을 떨쳐내야 합니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사람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 낙담과 실망과 두려움으로 삶을 포기한 사람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 편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하여 번지르르한 말만 하지 않도록 합시다! 그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눈을 바라보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합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 기회, 그분의 고통스러운 몸을 어루만지는 기회를 줍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그저 받기만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줄 것과 가르쳐 줄 것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세 번째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지혜에서 배워야 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18세기의 베네딕토 요셉 라브레 성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 거리에서 노숙하며 걸인 생활을 했던 성인은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영적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스승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사람의 가치는 가진 재산이나 저축 액수로 가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난한 이, 물질적 재산이 없는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에게 겸손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리가 겸손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기에 그를 모범으로 제시하십니다(루카 18,9-14 참조). 성전의 헌금함에 동전 두 닢을 넣은 과부 또한 가진 것이 전혀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주는 사람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본보기입니다(루카 21,1-4 참조).       

              
4.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 나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나라는 바로 인간의 마음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랍니다. 하느님 나라는 선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아버지께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가난과 복음화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지난해 청소년 주일 담화 주제인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19)도 올해 청소년 주일 담화의 주제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가난한 교회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마태 10,9-10). 복음적 가난은 하느님 나라가 퍼져나가기 위한 근본 조건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가장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기쁨의 표현을 보았습니다. 우리 시대의 복음화는 오로지 기쁨의 확산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참행복은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 우리가 재물과 가난한 이들과 맺는 관계의 방향을 이끌어줍니다. 우리를 앞서시는 예수님의 모범과 말씀으로 우리가 얼마나 회개할 필요가 있는지를 깨달아, 더 많은 소유보다는 더 나은 존재의 논리가 지배하도록 합시다! 성인들은 우리가 참행복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도록 가장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 제2주일에 거행될 요한 바오로 2세의 시성식은 커다란 기쁨을 주는 행사가 될 것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당신이 시작하고 이끄신 세계 청년 대회의 위대한 주보 성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분은 성인들의 통공으로 여러분 모두의 아버지와 친구가 되실 것입니다.

오는 4월에 우리는 구원의 희년 십자가를 젊은이들에게 전달한지 30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로 젊은이들의 위대한 순례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5개 대륙을 거쳤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1984년 부활절에 하신 말씀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젊은이 여러분, 성년을 마치면서 저는 이 희년의 상징을 여러분에게 맡깁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주 예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의 상징으로 온 세상에 들고 가십시오. 그리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만 우리를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모든 이에게 선포하십시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마음이 가난한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는 참행복을 실천하는 모든 이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가난한 마음, 하느님께서 하신 일에 대하여 기뻐 뛰고 놀라는 마음에서 샘솟습니다. 이는 모든 세대가 “행복하다”고 일컫는 성모님의 마음과 같습니다(루카 1,48 참조).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이시며 새로운 복음화의 별이신 마리아께서 우리가 복음을 실천하고 우리 삶에서 참행복을 실현하며 행복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바티칸에서
2014년 1월 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에
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