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택 신임 주교 삶과 신앙 

공학도 꿈꾸다 포콜라레 계기로 수도자의 길로




▲ 정순택(앞줄 오른쪽) 수사가 지난 1992년 1월 가르멜 남자수도회 인천수도원 성당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있다.



▲ 정순택 신부가 2009년 인천수도원에서 맨발의 가르멜 재속회원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 정순택(오른쪽) 서울대교구 신임 보좌주교가 조규만 주교에게 축하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하느님 사랑의 열정에 가득찬 수도 사제'.

 신임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정순택(베드로) 주교에 대한 세간의 평은 한결같다. '하느님만으로 족하다'는 가르멜 영성에 투철한 문자 그대로 '수도자'다. 그러기에 이한택(예수회, 전 의정부교구장) 주교에 이어 두 번째로 수도회 출신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에 임명된 정 주교는 가르멜 남자수도회에서 27년 7개월을 오롯이 수도자로만 살았다.

 정 주교의 또 다른 면모는 양성자다. 1992년 7월 16일 사제품을 받자마자 가르멜회 청원장을 시작으로 수련장, 서울 명륜동 학생수도원장, 학생 수사 지도 신부를 지냈고, 유학을 다녀와서도 광주 학생수도원장을 지내는 등 10년 가까운 기간을 양성 쪽에 힘을 쏟았다. 이는 특유의 온유함과 따뜻함, 봉사적 리더십에서 비롯됐다는 게 동료 수사들의 전언이다. 모든 것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려 하고, 공동체 형제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수도자였기에 양성자로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정 주교는 '공동체 안의 형제적 사랑'에 투철한 수도자이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자신보다도 늘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이 몸에 밴 탓에 함께 사는 형제수사들에게 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선배 수사들은 정 주교를 두고 늘 '우리 베드로, 우리 베드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올곧게 살았지만 순명에도 충실한 천생 수도자였던 셈이다.

 이같은 성품 탓에 정 주교는 2009년에 가르멜 수도회 로마 총본부에 8명밖에 없는 최고평의원(부총장)에 임명돼 동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 및 선교 담당으로 활동했다. 4년 6개월간 로마에 체류하면서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 가르멜회와 가르멜 수녀회, 맨발 재속 가르멜회까지 총괄하며 지역별 선교 현황을 샅샅이 살피고 함께하면서 지역 가르멜회의 일치와 협력에 자신의 모두 열정을 쏟아왔다.

 이렇게 하느님을 찾는 기도의 삶에 한결같았던 정 주교는 1961년 8월 5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산동본당 출신으로, 영남대 법대 국제법 교수를 지낸 아버지 정운장(요셉, 1929~2000)씨와 어머니 조정자(아빌라의 데레사, 1937~2000)씨 사이 1남 2녀 중 외아들이었다. 부모가 모두 포콜라레 성소 중 하나인 '솔선자(Volun teer)'로서 활동한 덕분에 이화여대 특수교육학과를 나와 특수교사로 사는 누나 정혜경(헬레나, 55)씨와 서울대 음대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인 여동생 정유경(체칠리아, 50)씨와 함께 성가정을 이뤘다.

 대구 효성초교와 서울 동일중, 우신고를 다니며 거의 전 과목 만점을 맞아 '수재'라는 말을 듣곤했던 정 주교는 서울대 공대 공업화학과에 입학, 아버지 바람대로 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듯했다. 하지만 평범한 공학도의 길을 걷던 정 주교의 삶에서 '분기점'이 생긴다. 대학 3학년 재학 중 주위 권유로 우연히 참석한 포콜라레 마리아폴리(마리아의 도시)에서 뜨거운 '신앙 체험'을 한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부르시고 쓰신다'는 체험이었다. '늦게 데워진 구들장이 좀처럼 식지 않는 것처럼' 신앙의 원체험은 오랫동안 뜨거웠다. 물론 공학도에서 신학도가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 졸업 때까지만이라도 하느님 부르심이 확실한지 기다려보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정 주교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신학교에 가겠다는 성소를 지켰고, 드디어 교구 신학생으로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려 했지만 허리를 다쳐 다시 신체검사를 받는다. 이 때가 가르멜회에 입회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허리를 다쳐 요양하는 동안 가르멜 영성서적을 읽으며 가르멜의 삶에 푹 빠져든 정 주교는 1984년 12월 가르멜회에 입회서를 낸 뒤 보충역으로 입대, 병역 의무를 이행하고 1986년 5월 수도회로 돌아온다. 그리고서 1988년 2월 첫 서원, 1992년 1월 종신서원을 하고 1992년 7월 16일 가르멜회 인천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고 온전한 수도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사제수품 뒤 가르멜회 청원장과 수련장, 한국지부 제2참사 겸 서울 학생수도원장 등을 지낸 정 주교는 2000년 로마로 유학을 떠난다. 성서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5년 가까운 수학 끝에 정 주교는 구약 시편 57편을 새로운 방향에서 해석하고 조명한 논문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Biblicum)에서 성서학 석사학위를 받고 2004년에 돌아온다. 귀국하자마자 한국준관구 제1참사 겸 인천수도원 부원장, 한국관구 제1참사 겸 광주 학생수도원장 등을 지냈으며, 로마 총본부에선 최고평의원으로서 가르멜회의 지평을 돌아보며 선교에 헌신했다.

 정 주교의 사촌동생인 조정래(서울대교구 방배동본당 주임) 신부는 "서울대교구는 교구가 커서 힘드시겠지만 본연의 따뜻함과 열성, 성실성, 따뜻함, 배려심으로 잘 보듬어 주시길 바란다"며 "특히 '사제들의 아버지'로서 사제들의 어려움과 애환, 걱정을 따뜻하게 품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 주교에 앞서 광주 학생수도원장을 지낸 가르멜회 강유수 신부는 "올해로 한국 진출 40주년을 맞은 가르멜회의 첫 주교님이신 만큼 이제는 기도해드리는 일밖에 아무것도 할 게 없다"면서 "기쁘기도 하지만 서운함이 앞선다"고 소회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