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주일 미사 강론

 

 

사순시기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님 수난 성지주일에 들어섰습니다. 오늘부터 사순시기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주간을 성 대()주간이라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주간에는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일들이 우리를 위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 거룩한 주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습니다.

 

성지주일은 예수께서 당신 빠스카 신비를 완성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전례는 그리스도의 개선 예고와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빠스카 신비의 두 측면을 잘 보여줍니다. 그래서 성지가지 축성과 행렬은 기쁨과 환의를 표현하고 있고, 미사 복음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전례와 수난 복음 자체가 너무나 분명한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또 다시 무엇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묵상을 위해 몇 가지 점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다른 복음들과 비교할 때, 마태오가 전하는 수난사에서 우리는 몇 가지 특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수난사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주요 개념이 절대적인 자유라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죽음을 맞이하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는 성서를 통해 표현되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당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손에 자신을 내어맡기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달리 성서의 내용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명하며 자유로이 수난의 길을 걸어가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자유로이 선택한 이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지고한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수난복음은 온통 자유와 사랑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예수의 무죄함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빌라도 아내의 꿈 이야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죽을 죄인으로 몰아붙입니다. 하지만, 실상 죄인은 예수가 아니라 그들 자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하느님 백성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리는 이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백성은 그리스도와 공동 운명에 참여한 백성입니다. 따라서 이 백성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동참합니다. 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곧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 기꺼이 동참할 때 우리는 참된 하느님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수난사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이중성, 그리고 사악함 등을 접하게 됩니다. 먼저 빌라도의 경우를 보면, 그는 예수의 무죄함을 확신하면서도 권력 유지를 위해 그분을 사형에 처하도록 방치합니다. 또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들 역시 율법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군중들 역시 사악함과 이중성을 드러냅니다. 오늘 수난 복음은 군중의 상반된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는 주님을 환호하며 맞이하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을 배척하고 단죄하는 모습입니다. 군중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받으소서.” 라고 외치며 예수를 환영합니다. 그러나 잠시 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아우성칩니다. 인간의 이중성과 사악함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유다는 스승을 팔아넘겼고, 베드로 역시 결정적인 순간 스승을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께서 체포될 때 모두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수난사의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러한 모습들, 즉 나약함과 이중성, 그리고 사악함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도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고 제자들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그분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편의에 따라 그분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 동참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우리 의지와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수난사는 결코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면 스승의 운명에 기꺼이 동참할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심 영광과 승리만을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있는 실패와 좌절, 고통과 노고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는 영광과 승리의 월계관은 거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유로이 받아들인 십자가의 결과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빠스카 신비의 핵심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보다 능동적으로 이 신비에 참여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 신비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성주간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주님 수난이 지닌 의미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를 되새기며 거룩한 부활축일을 준비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