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사적 카리스마의 기원과 발전(7)





2)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원의 삶


(1) ‘맨발’ (Discalced) 이라는 것이 왜 붙었는 가?

“맨발 가르멜 수도자들”이라는 명칭은 남자 가르멜 수도회 첫 번째 근본적인 호칭이 아니다. 남자 가르멜 수도회에 처음으로 붙여진 이름은 그 당시 우리 수도회 총장 신부님인 루베오 신부님이 붙여준 이름인 “관상 수도자들” 이다. 그런데 “맨발 가르멜 수도자들”이라는 호칭은 언제 공식적인 문헌에 등장하는 가? 루베오 총장 문헌에서 처음 등장한다. 루베오 총장 신부님은 문헌에서 “맨발 가르멜 수도자들”이라는 말을 썼지만, 당신이 직접 붙인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이 우리 수사들을 “맨발 가르멜 수도자들” 이라고 부르더라고 하면서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 수도회의 공식 명칭이 되었다.

사모님에 의해 창립된 이 수도원의 수사들을 왜 맨발 가르멜 수도자라고 불렀는 가? 초창기 수도자들은 실제로 맨발로 걸어다녔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리 선조들을 “맨발 가르멜 수도자”라고 불렀다. 1568년 남자 가르멜 수도회가 창립되었고, 1581년 알칼라 총회를 통해서 원 가르멜과 맨발 가르멜이 정식으로 분리된 약 13년 동안 수사들은 맨발로 생활을 하였다. 맨발 가르멜 초창기 회원들인 십자가의 성 요한, 안토니오,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님이 실제로 맨발로 생활을 하였다.

“맨발” 이라는 측면은 그 당시 15~16세기 스페인 개혁 수도회가 표방하였던 “상징”이었다. 그 당시 스페인 개혁 수도회인 프란치스코, 가르멜 등의 다른 수도회는 “맨발”이라는 상징적인 것을 표방하면서, 실제로 맨발로 다녔다. 이것은 개혁이라는 것을 상징하면서 철저한 이탈과 엄격함을 담고 있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도들을 모방하는 것도 여기에 담고 있다. 맨발로 다니는 것은 복음을 증거하는 상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수도회에게 제기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역사가들이 “맨발 가르멜” 이라는 호칭이 옳은 것인가? 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역사가들 중에는 우리 수도회의 호칭을 “데레사적 가르멜” 이라고 표방을 하는 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녀 데레사가 원하는 우리 수도회의 호칭은 “맨발 가르멜”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황청에서 인준한 우리 수도회의 공식 명칭 역시 “맨발 가르멜”이다.

16세기 스페인에서 개혁 수도회가 성공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수덕적인 차원인 “엄격함”에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당시 스페인의 왕 · 귀족· 부호들은 완화된 수도회들을 거슬러서 새로운 개혁에 기치를 내건 수도회 개혁 운동들을 후원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거나 죽었을 때 그들에게 후원함으로써 수도회가 개혁이 되고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지향하였다.


(2) 16세기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의 삶은 어떻게 이루어 졌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는 가?

수사들이 지향하고 있는 첫 번째 삶의 목적은 가르멜 봉쇄 수녀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상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있다. 1567년 사모 데레사가 만든 사모 데레사의 회헌 안에 들어간 남자 가르멜 수사들의 삶 역시 수녀님들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시간의 묵상과 수덕생활을 하고 있다. 두 번째 삶의 목적은 사도직에 있는 데, 이 사도직은 그 당시 개신교 이단으로 인해서 위기에 처한 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모님이 부여한 카리스마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신대륙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서 영혼 구원을 향한 성녀의 열망이 사도직에 담겨 있다. 이것은 수녀님들과 구분되는 특징이다.

성녀 데레사가 승인했던 맨발 가르멜 수사들의 활동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남자 가르멜 수도원인 두루엘로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활동인 “고해성사”를 주는 것과 “강론” 하는 것이었다. 고해 성사라는 측면에는 영혼을 영적으로 지도하는 것, 신비체험 · 신비현상을 식별하는 것이 가르멜 수사들이 지향해야 할 과제이다. 성녀 데레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작품에는 이러한 영적 지도와 영적 식별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 당시 스페인에서 맨발 가르멜 수사들은 신비현상을 식별하는 전문가로 통하였다.

또 다른 사도직 중에 하나는 영성생활을 살아내는 것을 교회에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성 생활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논문을 쓰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것이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또 사모 데레사가 말한 사도직 범주에는 초· 중 · 고등학교을 운영하는 것도 포함된다. 역사적으로 독특한 예외적인 사도직이 있었는 데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님은 리스본에서 창녀들의 회심을 도와주는 집을 운영하였다. 이것은 사모님의 뜻을 거슬러서 하였다. 살라망카에서 주교님이 우리 수도회에서 이것을 하도록 요청을 했으나 성녀 데레사가 반대를 했지만 그라시안 신부님이 이 사도직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3) 성녀 데레사가 원하신 맨발 남·녀 가르멜 수도회의 봉쇄 안에서 내적인 삶


① 맨발 가르멜 여자 수녀원의 봉쇄 안에서 삶

수녀님들의 관상적인 카리스마인 침묵과 고독, 봉쇄 환경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성녀는 봉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지에 대해서 말하면서 봉쇄의 삶에서 하느님과 사랑 겨운 대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고『창립사』 31장 46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46. 수도원 창립을 다 마치고, 세속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깊숙이 푹 파묻힌 그윽한 봉쇄 안에 들어 있게 된 기쁨이 그 얼마나 큰 것인지는 실제로 체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도 세속 사람을 무척 사랑합니다마는, 고요의 행복과는 겨룰 수가 없습니다. 그물에 걸린 바다의 생선을 보십시오. 도로 물에 놓아 주지 앉으면 죽어 버리지 않습니까. 천상 짝님이신 생명수의 흐름 속에서 살기 마련인 영혼도 마치 그와 같아서 덧없는 세상살이라는 그물에 걸리면 되돌아갈 때까지 산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매들의 경우가 꼭 그러하였으니, 내가 실제로 체험해 본 사실입니다.

밖에 나가서 이따금이라도 세속 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수녀는 아직도 자기는 주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생활한 물”을 찾지 못하였고, 천상 신랑께서 모습을 숨기시지나 않으셨는지 걱정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천상 짝과 같이 있는 것에 만족 못한 표니 으레 그럴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되는 이유를 다음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즉, 오로지 주님만을 위해 수도 생활을 하지 않았거나, 또는 수도 생활에 들어와서도 주님의 것이 되게끔 뽑아 주신 그 은혜와 흔히 있듯이 자기 부인(婦人)의 생명까지도 앗아가는 무참한 사나이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해 주신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고 장부가 제 아내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없기를!

이 텍스트는 사모님이 임종하기 몇 달 전에 쓴 것이다. 성녀 데레사는 1582년에 돌아가셨는 데, 그 해 마지막 창립지인 부르고스에서 출발해서(창립사 31장) 발렌시아로 가고 메디나 데 캄포로 여행하면서 부관구장인 안또니오 신부님의 명에 따라서 아빌라로 가는 도중에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임종하게 된다. 이 글은 가르멜 수녀들 ·수사들· 가족들 모두에게 주옥같은 사모님의 영적 보화가 담겨 있는 글이다. 사모님의 이 글을 해석함에 있어서 오늘날 우리들이 사는 현시대의 사고 방식에 어떻게 적응시키고 재해석해야 하는 지 의문이 들지만, 사모님의 글은 그 자체로 보고 받아들여야 한다.

수녀들이 살고 있는 “봉쇄”라는 틀이 덕행 실천, 특히 신·망·애, 향주 삼덕, 형제애를 비롯해 다른 덕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상 생활하는 데에는 중요한 틀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봉쇄”는 침묵 · 고독이라고 하는 관상 생활의 요소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기 때문이다.

사모님께서 원하셨던 봉쇄 가르멜 수녀원의 내부 생활은 무엇보다도 서로가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족적인 생활을 지향하였다. 따라서 성녀는 회원들 간에 참된 우정을 나누고 서로가 존중하고 평등하게 되하며,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그런 환경을 원하였다. 성녀는 서로가 좋아하는 끼리만 편을 가르는 편애(偏愛)를 아주 싫어하였다.

그래서 성녀가 봉쇄 가르멜 수녀원의 공동체가 가족적인 정신으로 바탕에서 세워지게 하기 위해서 성녀는 무엇보다도 소수 회원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를 지향하였다. 사모님이 바란 작은 공동체의 회원의 수는 처음에는 13명으로 시작하여 15명으로 늘어났고, 1581년 알칸다 총회에서 21명으로 결정하였다. 21명은 오늘날까지 유지되는 숫자이다.

성녀 데레사가 지향했던 삶의 방식의 특징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가르멜 수녀원의 공동체를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써, 형제애, 서로 상호간의 사랑, 편협한 사랑이 아닌 보편적인 형제애를 말한다. 이것을 성녀는 『창립사』 13장 5절에서 말한다.

5. 저는 신부님께 우리 생활을 보여드리고, 억제하는 것에서부터 형제적 애덕, 함께 하는 휴식 시 간까지 잘 가르쳐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휴식은 오직 자기 잘못을 더 알고, 엄한 규칙을 견디어 나가기 위해, 조금 기분 전환을 하는 목적으로 아주 절제있게 쓰여진 것입니다. 신부님은 나같은 것에 비길 수 없이 뛰어나신 분이므로, 가르친다기보다는 나야말로 배워야 할 많은 것이 있었습 니다만 하여간 자매들의 생활 방식을 가르쳐 드렸습니다.

성녀 데레사가 지향했던 공동체 이상적인 모습에서 공동체 시간표 안에 하루에 두 시간의 묵상기도를 부과 했고, 이와 더불어 2시간의 공동 휴식 시간을 부과 했다. 성녀는 이 공동 휴식 시간이 묵상기도 만큼 중요하다고 여겼다. 『창립사』13장 5절에 나오는 “휴식은 오직 자기 잘못을 더 알고”에서 “자기 잘못”(Falta)은윤리적인 부족함이 아니라 심리적인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동 휴식 시간에는 자매들의 심리적이고 인성적인 부족함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용서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부족함(하느님께 불순의 죄, 공동체 자매들에게 안좋은 일을 해서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에 대한 것은 공동 휴식때 하는 것이 아니라 집회 때 원장님이 교정을 해주거나, 식사 후에나, 끝기도 후 양심성찰 때, 원장님의 필요로 할 때 하는 것이다. 공동 휴식에 드러난 독특한 요소는 성녀 데레사의 인본주의적인 정신이 배어있는 요소이다.


② 수도 가족의 의미 (맨발 가르멜 남 ·녀 수도회가 합쳐서 가족 수도회를 구성)

오늘날은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하여서 남·녀 수도회가 가족 수도원이 큰 어려움이 없지만, 성녀 데레사 시대에는 여행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다. 수도원과 수녀원 사이 교류가 오가는 것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남·녀 가르멜 수도회가 하나의 긴밀한 연관성을 갖는 가족 수도회로 형성되는 것을 바랬다. 사모님은 남·녀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서로 긴밀하게 일치하고 상호 우정을 갖는 가족 수도회가 되기를 원하셨다. 성녀 데레사는 남자 수도원과 여자 수도원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셨다. 이것을 위해서 성녀가 사용했던 수단은 편지였다. 성녀 데레사는 편지를 통해서 서로 긴밀하게 통교하기를 독려하였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녀 데레사의 편지는 450통 정도에 이른다. 성녀는 돌아가기 직전까지 많은 병고와 여행을 하면서 사모님은 끊임없이 편지를 쓰면서 수사들과 수녀들과 통교를 하였다. 사모님의 편지 중에서 1582년에 마지막 부르고스 마지막 창립을 하고 나서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죽음의 여정을 걷는다. 그 때 병고 중에 돌아가시기 7시간 전까지 편지를 썼다. 마지막 편지에는 사모님의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염려가 담겨있다. (“마지막 편지”는 꼭 천천히 읽어 보시기 바람.)

남·녀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일치된 가족을 말하기 위해서 역사적인 실례를 살펴보면, 개혁 가르멜는 원 가르멜로 분리시키기 위한 시점(완화 가르멜이 맨발 가르멜 회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1575년 쯤)에서 상당히 어려웠다. 사모님은 맨발 가르멜 회원들이 원 가르멜에서 독립 관구로 승격될 수 있도록 로마에 청원을 하게 된다. 로마에 청원을 하게 되면 몇 몇 형제들을 특사로 파견하게 된다. 이 때 사용하는 여행경비가 부족하였다. 따라서 성녀 데레사는 여러 수녀원 · 수도원에 필요한 여행 경비를 청하였는 데, 수사님들보다 수녀님들이 도움을 더 많이 줬다고 한다.

성녀가 추진하였던 원 가르멜로부터 맨발 가르멜을 분리시키는 과정에서 우리 수도회에게 필요하였던 교황청 문서를 얻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이 많이 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스페인에서 로마로 두 분의 신부님을 파견하기 위해서 여행 경비가 들었고, 원 가르멜 수사들로부터 들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변장을 시켰다. 마치 귀족 · 기사들 처럼. 로마에 가서 이 신부님들이 몇 달 체류기간 동안 머무는 비용이 들었고, 원 가르멜 신부들을 피해서 다니는 데도 돈이 들었다. 원 가르멜에서부터 맨발 가르멜이 분리 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었는 데, 이 비용들을 성녀는 각 수도원 · 수녀원에서 각출하기를 원했다. 그 당시 분리 문서를 얻어내기 위해서 두 분의 신부님을 보내는 데, 이 신부님들이 귀족으로 변장한 모습을 성녀가 보고 기겁을 했다고 한다.

데레사적 가족에 대한 개념을 살펴보면서 현재 수녀원 사이에 협회라는 것을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수녀원은 독자적인 자율성을 누리면서, 동시에 서로 함께 연대하면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성녀가 바란 데레사적 가족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다.


③ 수덕 생활

수덕적인 차원은 사모님이 구현하고자 했던 복음 정신을 철저히 살고자 하는 그런 정신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성녀는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수덕을 최고라고 강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덕행을 실천하는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 성녀 데레사는 수덕적인 고행을 실천을 하되 유연함을 바탕으로 해서 이것을 잘 이루도록 하였다.

사모님이 말한 수덕 · 고행은 성녀가 혼자서 생각해서 만들어서 한 것이 아니라 가르멜 전통에서 이어받은 고행 차원을 말하였고, 가르멜 전통 뿐만 아니라 다른 수도회에서 실천되고 있는 고행을 함께 보았고, 더 넓게는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 수덕적인 전통 유산으로부터 물려 받았다. 하지만 성녀는 이것을 결코 강조하지 않았고 덕행 실천을 더 중요시 여겼다.

성녀 데레사는 그 당시 수덕 · 고행 실천 중에 성녀가 강조하였던 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귀족 출신 수녀들이 자신의 출신에 연연하지 하지 않고 그 명예를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신이 사회에서 누렸던 권리들을 내려놓는 것, 그래서 다른 회원들과 더불어 평범하고 동등하게 지내는 것을 성녀가 원하였다. 이것은 더 나은 공동체의 삶을 이뤄가기 위해서 성녀 데레사가 이렇게 한 것이었다.


④ 기도 생활 (관상 생활)

성녀 데레사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 공동체가 보편 교회가 요구하는 성무일도 뿐만 아니라 매일 두 시간의 기도를 하도록 부과하였다. 사모님이 수녀들에게 처음으로 기도를 부과할 때,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 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가대소, 산책을 하면서 자유롭게 시간에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나 1581년 알칸타라 총회에서 가르멜 수사 · 수녀들이 새로 정한 것이 같은 시간, 같은 가대에서 공동으로 기도하는 것을 부과하였다.


⑤ 철저한 청빈 정신

성녀는 당신이 세운 가르멜 수녀원 공동체가 은인들이 주는 희사를 통해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면서 당신의 정배들인 수녀들이 사람들이 나누어주는 희사를 통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따라서 사모님은 자신의 공동체들이 희사를 잘 얻을 수 있는 큰 도시에 세워지기를 원하였다. 성녀는 연금이 있는 수녀원을 창립을 하게 된 것은 첫 번째 가르멜 수녀원인 성 요셉 수녀원 이후, 세 번째 가르멜 수녀원 창립인 말라곤 수녀원에서 였다. 이 수녀원은 작은 마을에 창립되었기 때문에 희사를 받기 어려워서 성녀 데레사는 이 수녀원이 연금을 바탕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하였다. 그 이후에 연금을 갖고 창립한 수녀원이 여러 개 있었다.

사모님은 당신의 수녀님들이 철저한 청빈을 살도록 허락을 했지만, 그 이후에 연금을 비롯해서 여러 후원자들이 주는 희사금으로 수녀님들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고, 입회하는 자매들의 지참금도 수녀원 생활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⑥ 노동

수녀님들의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로 노동을 들 수 있다. 수녀원 공동체에서 “노동”이라고 하는 것은 사모님이 살았던 그 당시 노동시장에서 이루졌던 관행과 다른 노동 방식을 도입하였다. 예를 들어서 어느 기한 내에 일을 끝내야 하는 것은 수녀원 공동체 리듬이 깨어지기 때문에 성녀는 일 하는 대까지 하고 끝나면 그것을 제출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사모님은 정해진 날짜에 기일을 맞춰서 무언가를 완성해야 한다는 식의 노동을 도입하지 않은 그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수녀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상 생활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일을 도입하게 되면 수녀님들이 기도 생활에 방해되면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따라서 몸과 정신에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관상 생활에 방해되는 이유로 성녀는 수녀원에서 이러한 노동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또한 노동하는 데 있어서 한 가지 들 수 있는 것은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수방에서 노동을 하거나 공동 휴식 시간때 노동을 하도록 배려 하였다. 이것은 왜그런가 하면 기도 중에 중요한 침묵과 고독의 분위기가 공동체에 머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다. 따라서 성녀는 수녀님들이 공동으로 일하는 방은 만들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수녀원에서 일을 주문받을 때, 주문을 한 사람들이 수녀님들이 일한 것에 대한 돈을 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런 사람들과 소송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모님은 위대한 신비가 이자 상당한 현실적인 감각을 가진 여인이었다. 공동체를 관리하고 경영하는 데 행정적인 업무 처리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지닌 분이었다. 성녀 데레사가 어떻게 돈을 운영했던 경제적인 관점을 살펴본다. 성녀는 마치 회사의 CEO 같은 분이었다. 최근에 성녀 데레사를 연구하는 분야에서 특히 사모님의 창립자로서 공동체 경영 능력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데 아주 가난한 수녀이면서 엄청난 돈을 운영했다.

성녀가 쓴 작품 중에서 1576년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님을 위해서 쓴 『수도원 시찰법』에 신부님이 수녀원을 방문하게 될 때 원장 수녀님께 어떤 지도를 해야하고,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하는 지 자세한 권고가 나온다. 거기에 경제에 대한 부분도 언급되어있다. 사모님이 『수도원 시찰법』에서 그리시안 신부님에게 주의를 갖고 보도록 권고 중에 하나는 신부님이 교회법적으로 관할자로서 방문하게 될 때 수녀원의 수지 장부를 유심히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여기서 사모님의 큰 원칙 중에 하나는 수녀원에 들어오는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쓰지 말라는 것이다. 수입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면 빚을 지기 때문에 빚을 지지 말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모님이 돈을 사용하는 원칙은 우리는 그 돈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돈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4)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의 삶의 규범

남자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1586년에 만들어진 『회헌』은 맨발 가르멜 수사들의 삶의 방식에 있어서 성녀 데레사가 준 규범을 따르도록 전하고 있다. 회헌이 지시하고 있는 사모님이 남자 가르멜 수사들을 위한 메시지는 상당히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성녀 데레사가 돌아가신 이후에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서 사모님은 남자 가르멜 수도회 창립자가 아니다라는 이견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늘날 남 · 녀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창립자라고 하는 것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녀 데레사가 남자 가르멜 수도회의 회헌 안에 제시한 메시지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맨발 가르멜 수사들의 사도직은 맨발 가르멜 수녀들의 사도직과 약간 다르다. 수녀님들은 봉쇄 안에서 침묵과 고독의 삶을 통한 기도 생활을 통해서 교회의 힘을 불러 넣어 주는 것이 수녀님의 사도직이라고 한다면, 수사들의 사도직은 기도와 더불어 외부 사도직을 함께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남 · 녀 맨발 가르멜 수도회 모두는 관상 생활을 지향하지만 사도직의 각론에 들어가서는 수녀님과 수사님들의 사도직의 내용은 다르다.

남자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시초는 첫 번째 수도원인 두루엘로 수도원과 그 이후에 설립한 만세라 데 이바조 수도원에서 남자 수도원의 삶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초창기 회원이었던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안토니오 신부님이 두루엘로에서 어떻게 살았는 가를 통해서 남자 가르멜 수도회 바탕이 되는 삶을 유추할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 ‘마티아의 요한’이라는 이름을 갖고 원 가르멜 수도회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좋은 것을 배웠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 한 다음, 두루엘로에서 수도생활을 하기 전에 성녀 데레사에게 맨발 가르멜 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된다. 성녀 데레사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하면서 사부님에게 맨발 가르멜 수도회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가르쳐주었다. 그때가 성녀 데레사가 두 번째 창립 수녀원인 메디나 데 깜포 수녀원에서 말라곤 수녀원 창립 이후에 네 번째 수녀원을 창립을 준비하면서 몇 달간 바야돌리드에 머물면서 성녀 데레사는 수녀님들과 함께 십자가의 성 요한을 동반한다. 이때가 사부님의 수련기라고 통상 말하고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모님으로부터 가르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게 되고, 그 다음 해에 두루엘로로 가게 된다.

성녀 데레사가 첫 번째 개혁 가르멜 수도원인 두루엘로 수도원을 방문한 것은 1568년 대림 제 2주일이었다. 성녀가 두루엘로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수사님들의 삶을 유심히 보면서, 사모님이 수사님들에게 허용했던 것과 하지 말도록 지시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성녀가 두루엘로 방문한 이야기는 창립사 14장에 나온다. 사모님은 수사들이 많은 고행을 하고 엄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맨발로 다니고, 음식도 거의 먹지 않고, 지붕 위에서 눈 맞으면서 있는 과장된 고행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행을 하더라도 현명하고 절제있게 하도록 권고하였다.

성녀 데레사가 두루엘로 초기 수사들의 고행에 대해서 걱정한 것을 표현한 것이 있다. 너무 과장된 고행을 해서 혹시 악마가 우리 수도회의 창립을 방해하지 않는 가 하는 내용이 『창립사』 14장 12절에 나온다.

신부님들과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룬 후, 가냘프고 못난 나는 그렇게 너무 준엄한 고행일 랑 하지 않는 것이 좋을 성싶다고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심한 극기들을 하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이 개혁을 시작하는 데 적당한 인재를 주십사하고 그렇듯 간 곡한 기도를 드렸고, 지금 겨우 이와 같이 아름다운 첫 걸음을 내디뎠는데, 내 희망이 채워지기도 전에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염려에서였습니다. 참말 불완전하고 신앙이 약한 나였지요.

하느님의 업적인 이상, 그것을 시종일관 잘 섭리하여 주심도 하느님의 몫이라는 것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내게 결핍된 것을 신부님들은 갖고 계셨기에, 나 따위의 말쯤 전 연 문제시하지 않고 그대로 계속하셨습니다. 나는 이 같은 망극한 은혜에 족한 찬미와 감사를 주님께 드리지 못한 채, 더 없는 위로에 감싸여 그곳을 떠났습니다. 주님의 자 비에 의해 마땅한 봉사를 주께 드리며, 이 망극지은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아멘.

그 이유는 수녀들의 수도원 창립보다 이것이 월등히 큰 은혜임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 입니다.

성녀 데레사는 두루엘로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과도한 고행을 하는 것을 안좋아하였다.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던 수사들을 걱정하면서 염려하였다. 심한 고행은 원하지 않았지만, 수사들이 근처 마을에 가서 강론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수도원에 와서 고해성사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성녀는 아주 좋아하였다. 사모님이 바랐던 사도직의 일부분으로 설교와 고해성사를 원하였다. 따라서 성녀는 수도원 삶에 심한 고행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녀는 두루엘로 수도원에서 이루어졌던 심한 고행을 교정하면서 수사들이 균형잡힌 생활을 살도록 이끌었다.

몇 년 후에 마드리드 근방에 있는 빠스트라나에 두 번째 수련소를 만들었는 데, 이 빠스트라나는 초창기 개혁 수도원의 요람인 큰 수련소였다. 이 수련소에서 수많은 성소자들이 양성되었는 데, 여기는 초창기 두루엘로 수도원에 행했던 고행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엄청난 고행이 빠스트라나 수련소에서 자행되었다. 빠스트라나 수련소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있는 데, 까르도나에 카타리나라는 이태리 나폴리 출신 여인이다. 그녀는 귀족출신이고 왕족과 아주 가까운 관계에 있었다. 이 사람은 빠스트라나 수도원에 가까운 동굴에서 고행생활을 하였는 데, 그녀의 고행생활이 빠스트라나 가르멜 수도원의 수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과도한 고행이 이루어졌던 빠스트라나 가르멜 수련소의 수련장 신부님은 성 가브리엘의 앙겔 신부이다. 이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의 창립자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이다. 하지만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원의 창립자는 까르도나의 카타리나라고 까지 말하였다. 과도한 고행이 이루어졌는 데 불구하고 빠스트라나 수련소에는 많은 성소자들이 입회를 해서 양성을 받았고, 성소자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인물들이 입회를 해서 양성을 받았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인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이다.

이러한 과도한 고행이 자행되었던 빠스트라나 수도원을 교정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파견되어 수련소를 접수하기 바랬다. 사부님이 이 당시 빠스트라나 수도원의 과도한 고행을 교정하기 위해서 파견되었는 데,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 이후에 자신의 어느 작품에서 고행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야만적인 고행을 자행하는 것은 빠스트라나 수도원에서 자행되고 있는 과도한 고행을 염두해 두고 말한 것이다. 성 베네딕또 알로이시오 마리아노 신부는 성녀가 수사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말하는 데, 사모님은 당신의 편지에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맨발이라고 하는 것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개혁을 표방한 여러 수도회들이 사용했던 상징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