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사적 카리스마의 기원과 발전(9)







4장.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 이후 우리 개혁 가르멜 수도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그라시안 신부는 정말 우리 수도회에서 위대한 분이다. 최근에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 동안 숨겨져 있던 이분의 작품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는 상황이다.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는 우리 개혁 가르멜 수도회 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회 밖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 당시 왕과 왕족들과 연관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드러나고 있다. 신부님의 아버님과 형님이 그 당시의 왕인 펠리페 2세를 위해서 일을 하였다.


1. 성장 배경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는 1545년에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 바야돌리드는 예스의 성녀 데레사가 네 번째로 창립한 수녀원이 있는 곳이다. 바야돌리드는 16세기 스페인의 가스띠야 왕국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고 큰 도시이다. 바야돌리드에서 조금 내려오면은 아빌라가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발렌시아가 있고 더 위로 올라가면 부르고스가 있다. 그리고 발렌시아에서 서쪽으로 조금 가면은 메디나 델 깜뽀가 있다. 바야돌리드는 상당히 중요한 도시이고, 특히 16세기 중반까지 왕가가 있던 수도였다. 1571년 수도가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이전을 하게 되는데 그 전까지 바야돌리드는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중심 도시였다.

그라시안 신부의 할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으로서 스페인에 파견된 폴란드 대사였다. 그런데 스페인에 와서 혼외정사를 통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는 데, 그 아들의 아들이 그라시안 신부이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께서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스페인으로 오실 때는 폴란드 대사로 왔고, 세속 사람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딸을 낳고 자녀를 낳았는데, 그 다음에 주교가 되었다. 좀 독특한 경우이고, 복잡한 가계를 갖고 있다. 근데 어쨌거나 그라시안 신부의 가계, 가족 배경은 상당히 왕족이나 고위였고, 그 당시 귀족 배경이었다.

친할아버지의 성함은 후안 플라스빈데라고 하는데요 이 분은 당대의 위대한 인문주의자였다. 친할아버지는 아주 교양이 있는 분이였고, 특히 그리스의 여러 책들을 번역하실 정도로 상당히 학식도 깊은 분이였다. 이러한 할아버지의 영향 하에서 그 자녀들도 상당히 수준이 높았다. 당연히 그 영향을 받은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도 학식이 풍부하였다. 그라시안 신부의 부모님은 20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에 7명이 가르멜 수도자가 되었다. 그 중에 한 명이 그라시안 신부이다.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는 알칼라 데 에나레스에 있는 알칼라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 알칼라 대학은 당대의 시스네로스 추기경에 의해서 설립이 되었다. 이 대학은 그 당시까지 이어오던 대표적인 신학대학인 살라망카 대학을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살라망카 대학에서 모든 중요한 신학 이루어진 반면에, 알칼라 대학은 이것과는 달리 인문학, 철학 등이 아주 융성 했다. 그래서 이 두 대학이 서로 보완을 하였다. 그라시안 신부는 알칼라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라시안 신부는 알칼라 대학에서 두 개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나는 철학 또 하나는 신학 분야이다. 신학만 해도 벌써 19살에 받으셨는데, 그 당시 상당히 수준 높은 등급의 신학자 였다고 한다.


2. 맨발 가르멜 수도회 입회

그라시안 신부님은 이미 사제가 된 상태에서 맨발 가르멜에 입회하였다. 그러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 당시에 개인적으로 서로 접촉이 없었다. 그런데 그라시안 신부가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한 이유는 두 가지 부분에서 가르멜에 관련된 것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수도회를 선택하였다. 하나는 그라시안 신부는 성모님을 많이 사랑하셨서, 성모님께 봉헌된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를 하였다. 또 하나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많이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물론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사모님의 인품이나 성덕을 익히 들었고, 예수의 성녀 데레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선택하였다.

그라시안 신부는 빠스뜨라나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빠스뜨라나 수도원은 두루엘로 수도원과는 전혀 다른 수도 생활 환경이었다. 이 수도원은 너무 과도한 고행이 자행되던 곳이었다. 특히 그 당시 수련장 신부인 가브리엘의 앙헬에 의해서 이것이 많이 부추겨졌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라시안 신부는 너무 과도한 고행이 자행되는 그 상황을 감내하기는 했지만 나가고 싶은 유혹도 받았다. 그러나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사모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결국 남아서 서원을 하였다.

그라시안 신부는 상당히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창기에 위대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예를 들어서 이 신부는 젊어서부터 상당히 많은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교황, 사도좌 순시자를 비롯해서 안다루시아 지방을 순시하는 책임자였고, 또 갈멜 수녀들을 순시하는 책임자가 되었으며, 포르투갈 지역의 책임자가 되기도 하였다. 이 다양한 중요한 직책을 소화해 내었다. 그만큼 젊어서부터 많은 활동을 우리 수도회를 위해서 하였고 그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그라시안 신부는 우리 수도회 개혁 말기에 상당히 불운을 겪게 된다. 1592년에 개혁 가르멜 수도회로부터 완전히 쫓겨나게 되고 그로부터 얼마 후, 자신의 억울함을 상소하기 위해서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여행 중에 터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그 해적들에게 납치가 돼서 아프리카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된다. 해적에게 납치가 돼서 노예 생활을 하고 나서 다시 풀려나게 된 다음에는 다시 개혁 가르멜 수도회로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저지당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그라시안 신부는 완화 갈멜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완화 갈멜 신부들과 더불어서 그 당시 저지대라고 표현하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라시안 신부는 이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1614년 브뤼셀에서 임종을 하게 된다. 임종 하기 전에 사모님의 시복을 보게 된다.

1999년 12월 15일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총평의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를 우리 수도회에서 쫒아낸 거에 대해서 철회를 했다. 그래서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 회원으로서 다시한번 인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라시안 신부는 일생 동안 맨발 가르멜 회원으로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3.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대 관구장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대 관구장이었다. 그리고 1585년에 리스본에서 총회를 하게 되는데요. 그 때 2대 관구장으로 도리안 신부가 선출되게 된다. 그 때부터 도리안 신부를 따르는 그룹과 그라시안 신부를 따르는 그룹 사이에 분열이 시작되었다. 도리안 신부를 따르는 측에서 그라시안 신부를 상당히 많이 모함하고 없는 죄도 갔다가 뒤집어 씌우면서 상당히 과격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도리안 신부 측에서 그라시안 신부를 모함했던 주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그라시안 신부는 수도원 밖에서 많은 설교를 했고 성녀 데레사를 비롯해서 성녀 데레사의 딸 수녀님들과 많은 우정을 나누었다. 또 그는 그 당시 상당한 석학이었다. 그라시안 신부는 석학으로서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으면서 밖으로 많이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까 갈멜 수도회 내에서 다른 수사들의 질투를 많이 받았다. 거기에 더해서 도리안 신부 측에서 또 그라시안 신부를 모함했던 것 중 하나가 그렇기 때문에 성녀 데레사의 개혁이 실패할 수 있는 위험을 이 신부로 인해서 야기가 됐다는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모함을 갔다가 뒤집어 씌우면서 그라시안 신부를 공격하고 결국에는 내쫓게 되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라시안 신부는 지극히 사도적인 분이셨어요. 특히 사모 성녀에게서 이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많이 받으셨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설교와 강론을 하면서 많은 영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도하는 분이었고 관상가였다. 심지어 밤늦게 까지도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도리안 신부의 개혁 노선은 은수자적인 삶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활동을 배제했다. 그러니까 아주 약간의 활동을 하고 은수자로서 사는 것을 당신의 수도회에서 정착되기를 바랬던 것이 도리안 신부의 비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제들이 수도원에 많이 남아있기를 바랬고, 나가서 활동하고 강의하고 이런 것을 바라지 않으셨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도리안 신부는 그라시안 신부를 상당히 이상한 인물로 보았다.


4. 저술가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창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한 저술가이자 상당히 많은 저술을 하신 분이다. 그라시안 신부가 당신의 여러 작품들에서 다뤘던 내용들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영혼을 구원하는 것, 사도직, 하느님 나라를 확장하는 것, 성녀 데레사께서 이루신 개혁을 옹호하는 일, 그 뿐만 아니라 그라시안 신부님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옹호하는 많은 이야기를 당신 작품에 남기셨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라시안 신부는 당신의 일생에 대해서 서술한 일종의 자서전을 쓴 적이 있다. 그 자서전의 공식 제목은, 『아나스타시오의 순례』이다. 아나스타시오는 그라시안 신부의 이름이다. 그래서 당신의 생애를 이 작품을 통해서 전하고 있다. 그는 『아나스타시오의 순례』에서 왜 자신이 맨발 가르멜 수도자가 됐는지, 자신이 했던 사도적인 활동은 무엇이고, 수도회 내에서 고통 받은 여러 가지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사모 성녀 데레사와 가르멜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 창립의 역사에 대해서 또 작품을 하나 저술하였다. 성녀 데레사가 『창립사』를 쓸 당시에 사모님은 당신의 작품에서 이미 가르멜 신부들이 창립에 대해 쓰신 것이 있다라는 간접적인 언급을 하였다. 그래서 남자 가르멜의 창립이야기는 그라시안 신부가 저술하였다. 그래서 우리 수도회 내에는 여자 수도원의 창립 이야기를 담은 사모님의 『창립사』 그리고 그라시안 신부가 남자 가르멜의 창립 이야기를 다룬 『창립사』 이 두 가지 역사서가 전해온다. 그라시안 신부에 의해서 저술된 『창립사』는 159? 년에 집필되었다.

리베라 신부가 쓴 『성녀 데레사의 생애에 대한 단편』이라는 책이 있다. 이 신부는 역사상 사모님의 전기를 처음으로 쓴 이로 예수회 회원이다. 1590년대 초반에 이 작품에 저술되었는데, 그라시안 신부는 리베라 신부님이 쓴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전기를 보면서 빠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일련의 목록을 만들어서 체크를 하게 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라시안 신부는 이 작품을 쓰게 됩니다. 『리베라 신부님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에 대한 단편’』 이런 제목으로 출간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라시안 신부는 사모님이 이승에서 돌아 가시면서 저승으로 가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쓴 내용인 ‘성녀 데레사의 그 어떤 여정’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그 당시 상황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모님과 더불어 대화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그라시안 신부의 작품들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다. 현대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Teresianum에 가르멜 수도회 역사 연구소가 있다. 거기에는 Monumento Historico Carmelitanos Teresianos 라고 해서 데레사 가르멜의 역사 도서 전집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지금 현재까지 26권, 27권까지 출간되었다. 거기서 그라시안 신부의 교의적이고 영성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주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는 책이 서너 권 된다. 그리고 부르고스 관구의 실베리오 문고는 좀 전에 소개한 전집보다 더 권위가 있는 작품인데, 실베리오 신부님이 1930~ 40년대에 그라시안 신부의 주요 작품들을 3권으로 출간하신게 있다.


5.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예로니모 그라시안 신부와 관계

많은 독자들에게 관심거리 중에 하나는 그라시안 신부와 성녀 데레사 사이의 깊은 영적인 우정과 사랑이다. 그래서 사모님이 그라시안 신부님을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대하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그라시안 신부는 1572년에 사도좌 순시자로서 안다루시아 지역을 순시할 때 베아스 가르멜 수녀원에서 성녀 데레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 당시 사모님의 나이는 60살이었고 그라시안 신부는 30세에 불과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그 당시에 베아스 수녀원 면회실에서 그라시안 신부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제 일생에서 가장 좋은 순간이었다고". 그라시안 신부는 사모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술회(述懷)하고 있다. “아주 완전하면서도 부드러우신 분이라고, 그런 분은 전에 본 적이 없다고”. 그리고그라시안 신부는 사모님과의 우정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 우정은 정말 천사적인 우정이라고”. 그라시안 신부는 또 사모님이 자신을 어떻게 사랑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어머니 다음으로 자신을 너무 너무 사랑하셨다고”.

이렇게 서로 깊은 애정을 지녔던 그라시안 신부와 예수의 성녀 데레사 사이가 1581년 그라시안 신부가 관구장으로 선임된 다음부터 점점 더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일련의 모습을 보게 된다. “왜 그랬는가,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됐는가”. 이 주제는 상당히 논쟁 중에 하나이다. 왜 이 두 분이 그라시안 신부가 관구장으로 선임되고 난 후에 멀어지게 됐는가에 대해서 살펴본다. 두 분이 좀 애정적으로 좀 소원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어떤 이유를 들 수 있다. 1581년 그라시안 신부가 관구장으로 선임된 이후에 당시 수사들이 그라시안 신부님에 대해서 상당히 모함도 하고 시기 질투를 하게 된다. 그 이유 중에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그라시안 신부가 특별히 수사들보다 가르멜 수녀들을 많이 챙겼다는 것이다. 그는 수녀원을 많이 방문하고 또 강론도 하고 그러니까 수사들은 그라시안 신부는 수녀님들하고 더 많이 있다라고 모함을 하고 시기 질투를 하였다. 이런 일 때문에 그라시안 신부 본인도 힘들지만 수녀님들도 힘들어 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사모님에 대한 애정, 수녀님들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고 그런 표현을 덜 했다는 것이다.

그라시안 신부가 사모님을 심정적으로 점점 더 거리를 두고 멀리하게 된 이러한 일들은 어떤 추측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그것은 1581년에 사모님이 그라시안 신부님에게 쓴 일련의 편지들을 분석해 보면 잘 드러난다. 사모님은 그라시안 신부가 당신을 멀리한다고 많이 불평을 하였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추적해 들어가다가 보면은 왜 그랬는지 이런 정황들을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6. 그라시안 신부가 성녀 데레사의 개혁 운동에 기여한 점

그라시안 신부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삶의 스타일을 배웠다. 사모님이 지향했던 형제애, 인본주의적인 정신, 수도회 내에서의 애덕 등 이런 것들을 배웠다. 이러한 것들을 수도회 내에서 잘 꽃필 수 있도록 장려한 분이 그라시안 신부이다.

또한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단순히 관상적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사도직을 지향하는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옹호하였다. 물론 사도직은 관상에서부터 나오는 것이지만 그러나 관상뿐만이 아니라 사도직 역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카리스마라고 하는 것을 옹호였다. 이것은 사모 성녀 데레사께서 지향했던 카리스마와 같은 선상에 있다.

또한 그라시안 신부는 영혼 구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이야기였다. 구체적으로 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 다룬 책을 한 권 출판을 하였다. 거기서 그라시안 신부는 아주 명시적으로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선교적인 특징을 갖는 수도회라고 분명히 언급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그라시안 신부의 뒤이어 관구장이 된 도리안 신부와 갈등을 빚는 단초가 되었다. 그라시안 신부는 관구장의 허락 없이 포르투갈 쪽 관할권자의 동의를 얻어서 이 책을 출판하게 된다. 결국 이 책의 출판이 그라시안 신부님을 추방하게 되는 어떤 죄명 중에 하나로 덧붙게 된다.

그라시안 신부가 기여한 것 중에 하나는 당시에 대학공부나 신학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회원들의 전체적인 교육 평균 수준을 끌어올리는 일련의 조치를 하였다. 개혁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어떤 영성적인 운동으로써 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잘 토대를 갖는 그런 개혁 운동이 되도록 방향을 이끌어 갔다. 그래서 그라시안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수도원들이 당시에 대표적인 대학 도시들 근처나 대학 도시 안에 세워지도록 바랬다. 그래서 그라시안 신부는 그 대학으로부터 우수한 지원자가 들어오고, 우리 회원들 역시 우수한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학문적으로 탄탄한 토대를 갖도록 하여서 대학의 여러 학위도 취득할 수 있도록 장려하였다. 그래서 그라시안 신부는 심지어 아주 비판적인 이야기까지 하였다. 읽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는 그런 수사들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그런 수사들이 가득 차면 우리 수도회가 정말 멍청이 수도회가 되지 않느냐 그 정도로 비판하시면서 남자 회원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러한 그라시안 신부의 학문적인 비전은 확실히 사모 성녀 데레사가 지향했던 이상과 개혁 가르멜 수사들의 이상과 딱 맞아 떨어졌다. 그런데 1581년 알칼라 총회에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회헌을 만드는 입법과정에서 첫 번째 회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개혁 가르멜 수사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학위를 따는 것은 금하는 조항을 집어넣었다. 이 입헌 과정에서 이러한 조항이 들어가게 된 것은 사실 그 당시 초기 개혁이 성녀 데레사 와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이어받은 그라시안 신부를 위시해서, 그 이외 많은 석학들에 반하는 그런 개혁 운동으로써, 무엇보다도 수도원에 그냥 수방에 틀어박혀서 기도하고 관상하는 것에만 지향을 둔 소위 말하면 엄률 개혁 가르멜 수사들의 어떤 힘이 여기서 미치고 이것이 개혁 그 당시 초기 개혁을 주도해 갔다는 그런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개혁 정신에는 선교적인 정신이 상당히 깊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 역시 당신도 아프리카에 여러 선교사들을 보냈다. 더 나아가서 멕시코에도 선교사들을 보냈다. 대표적으로 아프리카 지역의 콩고하고 앙골라 지역에 선교사들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모님의 선교적인 카리스마는 도리안 신부가 총장으로 들어서면서 스페인 내에서는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역시 멕시코 특히 남미 특히 멕시코 지역은 거의 그냥 포기된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사모님의 선교적인 카리스마는 이태리로 넘어가서 로마 공동체를 통해서 전 세계로 퍼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선교 정신은 이태리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통해서 활짝 꽃피게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맨발 가르멜 수도원의 상당수는 이태리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공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