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사적 카리스마의 기원과 발전(10)







5장.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구현한 이들



1. 성 요셉의 마리아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를 일컬어서 당신의 창립 개혁 사업을 이어받을 후계자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상당히 이 수녀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 역사상 가르멜 수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저술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모님은 마리아 수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인정하였고, 그녀는 상당히 지식인이었고 많이 배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적으로 이 수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역사가들은 이 수녀에 대해서 크게 다루지 않았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 역사상 상당히 아주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 뿐만이 아니라 그라시안 신부 역시 이분을 존경하고 아꼈다. 그녀는 상당히 개혁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라시안 신부가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난 다음에 도리안 신부가 맨발 가르멜 수도회 통치를 맡게 되면서, 그라시안 신부와 관계된 여러 가지 일련의 사건에 마리아 수녀는 개입하게 된다. 그래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로마로부터도 상당히 요주의 인물로 지목 받았다. 이로 인해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기 역사가들은 이 수녀에 대해서 많이 다루지 않고, 숨겨진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1) 성장 배경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출신은 똘레도의 유력한 귀족인 세르다의 루이사 부인 남동생의 딸인데, 정상적인 혼인에서 나은 딸이 아닌 혼외로 난 딸이다. 그 당시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1562년 세루다의 루이스 부인의 저택에 몇 개월 머물렀지 않았다. 그 때에 성 요셉의 마리아가 거기에 있어서 사모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젊은 시절 아주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를 일컬어서 자주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면서 하는 이야기가 ‘성 요셉의 마리아 자매를 학자다 현자다’ 이런 식으로 부르곤 했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성경에 대해서 아주 박학했고, 어떻게 보면 학식의 측면에서 봤을 때는 사모님보다 더 수준 높은 그런 그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지식과 학적인 면에서는 사모님보다 더 우월했고 다만 체험적인 면에서만 사모님이 더 나았다. 그래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를 후계자라고까지 말하였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혈통은 “메디나 시드니아”라고 하는 공작 가문 출신이다. 성녀 데레사가 맨발 가르멜을 창립하기 전에 성 요셉 수녀원을 창립하기 바로 전에 똘레도에 있는 세르다의 루이사 부인 저택에 머물렀는데, 사모님은 그 부인이 남편을 여의었기 때문에 위로해주러 갔다. 이 때 사모님은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를 만났다. 그 당시 성 요셉의 마리아는 13에서 14살 정도였다. 이 수녀는 루이사 부인의 조카로서 지내면서 상당히 수준 높은 교육을 거기서 받고 있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와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와의 인연은 그 이후 7년 후에 다시 이어지게 된다. 사모님이 말라곤 수녀원, 똘레도 수녀원 창립할 즈음이었다. 이 당시에 다시 세르다의 루이사 부인 저택에 머물게 되는데, 다시 성 요셉의 마리아의 수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 이 수녀의 나이는 약20세 되었고,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가르멜에 들어가고자 하는 성소를 갖게 되었다.

2) 성소

1562년에 그 당시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세르다의 루이사 부인 댁에 이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 갔을 때, 13살이었던 성 요셉 마리아 수녀는 자기 친구들과 함께 사모님에 대해서 많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사모님은 많은 탈혼과 신비 체험으로 유명했고 또 성덕이 출중하다는 소문 때문에, 소녀였던 마리아와 그 친구들은 문틈으로 정말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진짜 탈혼을 하고 공중부양을 하는 가를 문틈으로 엿봤다. 그런데 그 이후 1562년에 이렇게 사모님을 곁에서 엿봤던 그 시절이 지나고 약 7년 후 1569년에 사모님이 다른 수녀님들과 더불어서 창립을 위해서 다시 똘레도에 오게 되었을 때, 성 요셉의 마리아는 가르멜 수녀님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가르멜 성소를 갖게 되었다. 특히 그 당시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아주 자상하면서도 부드럽고, 현명하면서 신중한 모습, 아주 엘레강스하면서 섬세한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러면서 사모님과 좋은 영적 우정을 맺게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석학인 레온의 루이스 수사는 가르멜 수도회에 사모님의 작품을 처음으로 1588년에 살라망카에서 출판하신 분이다. 루이스 수사님이 사모님을 일컬어서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마치 자석과 같아서 사람들을 다 끌어들이는 매력을 가진 분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가 성소를 갖게 된 데에는 사모님과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모님은 사람들의 내면에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품, 그 가치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그래서 사모님의 이런 안목으로 인해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성소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22살에 1571년 말라곤 갈멜 수녀원에서 서원을 하였다.

3) 가르멜의 삶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서원 이후에 1572년에 베아스 가르멜 수녀원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세비야 가르멜 수녀원을 1575년에 창립하게 된다. 따라서 그녀는 세비야 갈멜 수녀원에 원장 수녀로 소임을 하게 된다. 세비야 가르멜 수녀원의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사모님과 더불어서 긴밀한 관계를 편지로 왕래하였다. 하지만 사모님이 마리아 수녀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져 오지만, 성 마리아 수녀가 사모님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져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런 편지들은 없애버리는 좋지 않은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세비야 가르멜 수녀원의 원장으로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상당히 많은 고통과 모함을 받았다. 그 당시 성 요셉의 마리아 원장 수녀뿐만 아니라 사모님과 그라시안 신부에 대해서 상당히 좋지 않은 험담이 오고갔다. 특히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그라시안 신부와 내밀한 우정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은 소문들로 인해서 많은 고통을 받았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프랑스 갈멜 창립을 위해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프랑스에 파견되어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하진 않았다. 프랑스에 맨발 가르멜 수도회를 창립하신 분은 예수의 안나 수녀와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이다. 그 이후에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1585년에 리스본 가르멜 수녀원을 창립하였다.

1585년 리스본 가르멜 수녀원 창립 이후 1590년 ~ 1594년에 도리안 신부가 가르멜 수도회 통치를 맡게 되었다. 그 이후에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에 좋지 않은 일련의 일들이 있었다.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구현하고자 했던 제자 수녀들의 그룹인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 예수의 안나 수녀,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들이 도리안 신부에 의해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이 세명의 수녀들은 1581년 알칼라에서 만들어진 사모님의 회헌을 유지하도록 로마에 청원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도리안 신부와 갈등을 빚게 된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탄압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생애 말년에 꾸에르바 수녀원에서 지내면서 일종의 유배 상태로 1603년에 임종을 맞게 되었다.

4) 저술가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저술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녀가 쓴 대부분의 책은 역사서들이다. 무엇보다도 남녀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가 저술한 책들은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 초창기의 창립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품들은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의 책은 그 당시 초창기에는 출판이 되지 않았다. 최근1979년에 이 수녀의 책이 두 번째 판본이 나왔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가르멜 수도회에서는 대표적인 위대한 저술가로 뽑힌다. 이 수녀는 글을 쓰는 스타일이 성녀 데레사 보다도 더 글을 잘 쓰는 문필가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쓴 글의 내용은 다른 차원에서 보다 깊은 가치를 갖지만,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문체나 여러 가지 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사모님보다 더 글을 잘 쓰는 문필가였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이 저술한 책 가운데 『el libro de recreacion』(휴식에 관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수녀원에서 점심식사하고 저녁식사 하고 나서 공동휴식을 하는 상황에 수녀들이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께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그 질문에 대해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가 대답하는 형식을 이루고 있다. 수녀들과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의 주제가 상당히 중요하다. 따라서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한다.

『휴식에 관한 책』에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여러 장을 통해서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였다. 특히, 우리 수도회 초창기의 개혁의 역사, 자신의 성소, 자기가 젊은 시절의 생활, 그라시안 신부님에 대해서, 그라시안 신부님을 옹호하는 이야기, 성녀 데레사의 기도 (데레사적 기도) 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따라서 『휴식에 관한 책』은 일련의 다양한 주제를 섞어서 소개한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지향하는 내용의 중점은 성녀 데레사와 성녀 데레사의 개혁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가르멜 역사서이자 동시에 영성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대표적인 작품 중에 『ramirete de mira』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mira’은 꽃이라는 뜻이다. 이 내용은 상당히 슬프고 고통에 차 있는 내용이다. 주로 그 당시에 박해 받던 초창기의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회원들에 대해서, 그들의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하고 있다. 특히 그라시안 신부을 비롯해서 박해 받았던 초창기 개혁 가르멜 회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ramirete de mira』은 초창기 개혁 가르멜 회원들의 고통에 대해서 전하는 아주 슬픔에 가득 차 있는 작품이면서 아주 위대한 작품이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의 책 중에 교훈적인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Instrucciones de Novicias’』(수련 수녀들을 위한 가르침) 있다. 이 책은 출판은 되지 않았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그 당시 개혁 가르멜 남자 수도회 수사들(특히 수련 수사들)을 위한 지침서는 있었지만, 그 당시 수련 수녀들을 위해서는 지침서가 없었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가 저술한 이 책은 수련 수녀님들을 위해 참 좋은 지침서가 되었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은 참 많은 박해를 받았다. 왜냐하면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의 어떤 정수를 옹호하고 변호하고 방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 수녀는 예수님과 사모 데레사께 사랑에 빠졌고, 더 나아가서 가르멜 수도회와 사랑에 빠졌으며, 이러한 선상에서 그라시안 신부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므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아주 잘 발전시키고자 했고, 대표적인 데레사 성녀의 카리스마를 물려받은 인물이다. 바로 이로 인해서 많은 박해를 받았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에 대해서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다음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그라시안 신부를 아주 존경하고 사랑하셨다.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이런 험담, 모험이 있었다. 두 분이 이제 서로 내밀한 우정을 맺으면서 scandal이 있었다. 이로 인해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는 그라시안 신부를 위해서 옹호를 하면서 많이 힘들어 했다. 그래서 힘들어 하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를 위해서 그라시안 신부님 역시 변호하고 옹호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라시안 신부가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성 요셉의 마리아의 수녀는 누구보다도 아주 순수한 영을 갖고 있고 거룩하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아주 훌륭한 정배이시다.” 라고 하였다.

2. 예수의 안나 수녀

1) 생애

예수의 안나 수녀는 메디나 델 깜뽀에서 1545년에 태어났다. 부모님은 그녀가 9살 때 돌아가셨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기적적인 현상이 하나 있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7살 때까지 귀머거리였고 말을 못하는 벙어리였다. 그런데 훗날 예수의 안나 수녀님의 전기를 쓴 전기 작가들은 이 시절에 예수의 안나 수녀는 비록 이야기 하면서 말은 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말하게 될 모든 것을 다 생각하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극히 신심 위주의 전기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관점이다. 그리고 전기 작가들은 안나 수녀가 이미 10살에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정결서원을 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신심 위주의 전기 작가들이 이야기한 일화 중 하나이다.

2) 가르멜 수녀원 삶

예수의 안나 수녀는 자신의 영적 지도 신부인 예수회 베드로 로드리게스 신부를 통해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1570년에 아빌라의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에 입회했을 당시 사모님은 아빌라에 없었고 똘레도에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똘레도에서 아빌라의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에 왔을 때 예수의 안나 수녀를 보고 바로 그녀가 가진 인품, 내면적인 가치를 직관적으로 알았다. 따라서 사모님은 젊은 청원자였던 예수의 안나 수녀의 영적이고 윤리적인 인품 전체가 갖는 성숙한 품격에 대해서 바로 알아보았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비록 예수의 안나 수녀가 수련자였는데도 살라망카 수녀원 창립 당시에 그녀를 수녀원 창립에 동행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안나 수녀에게 살라망카 수녀원의 다른 수련 수녀들을 돌보도록 부탁하였다. 사모님은 어떻게 보면 예수의 안나 수녀에게 일종의 수련장 역할을 맡겼다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수도생활 중에 많은 공동체 원장을 맡았다. 베아스테 세구라, 그라나다 수녀원의 원장을 하였다. 그녀가 그라나다에 원장 소임을 할 때 십자가 성 요한을 알았다. 사부님은 예수의 안나 수녀를 위해서 『영혼의 노래』를 저술하였다. 또한 예수의 안나 수녀는 살라망카 수녀원의 원장도 역임하였다. 살라망카 원장 시절에 프랑스를 거쳐서 유럽 전체에 가르멜 수녀원을 전파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안나 수녀는 어떻게 보면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다. 1604년에 예수의 안나 수녀는 프랑스로 진출을 해서 프랑스의 파리 공동체를 설립을 하였다.

예수의 안나 수녀님는 살라망카의 원장 때에 그 지역의 많은 귀족들과 신학자들과 더불어서 다양한 관계를 맺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의 안나 수녀는 그 당시 어떤 고등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여러 학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예수의 안나 수녀의 인품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많은 호감을 주고 매력을 주었다. 예를 들어서 그녀는 살라망카 대학교의 석좌교수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아우구스티노스 수도회 레온의 루이스 신부와 친분이 있었다. 그가 욥기를 번역하였을 때 이 책을 예수의 안나 수녀에게 헌사하였다. 그리고 당대 신비가였던 십자가 성 요한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영혼의 노래』를 저술했을 때 역시 예수의 안나 수녀에게 헌사하였다.

예수의 안나 수녀의 생애 마지막은 참으로 비참하였다. 그녀는 거의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중병으로 인해서 상당한 고통 속에서 마지막 생을 보내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1621년 브뤼셀에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당연히 1614년에 있었던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시복을 보았지만 1622년에 있었던 시성식은 보지 못하였다.

3) 사후 및 평가

안나 수녀는 사후 1640년 즈음에서부터 시복 절차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시복 진행이 진전되지 못했다. 그 당시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두 가지 차원에서 시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시복 시성할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그 당시에 안나 수녀를 위해서 시복을 할 수 있는 자금이 부족했다. 또 하나는 그 당시 여전히 도리안 신부 계열의 개혁 가르멜 수사들의 성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사모님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은 이 분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복 절차가 시작되기는 했지만은 큰 진전을 못 봤다.

안나 수녀의 사후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극과 극이었다. 많은 분들이 이 분을 극찬하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을 했다. 이 분에 대해서 상당히 극찬했던 분 중에 대표적으로 가르멜 수도회 초창기 대표적인 인물인 예수의 토마스 신부이다. 이 분은 안나 수녀의 장례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당시에 이 수녀에 대해서 아주 극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안나 수녀에 대해서 비판했던 사람들 중에 대표적으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들 수 있다. 바르톨로메오 안나 수녀는 예수의 안나 수녀님을 칭찬하는 그런 강론을 들은 후에 그녀는 예수의 안나 수녀님을 비판하면서 예수의 안나 수녀님은 모든 일에 있어서 머리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그게 바로 이 예수의 안나 수녀의 결점 중에 하나라고 비판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모든 일에 있어서 상당히 주도적이고 용의주도했다. 그리고 당신이 뭘 하겠다 하면은 그 의지를 철회하지 않고, 그래서 심지어 사모님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1582년 6월 마지막 편지에서 안나 수녀에게 심지어는 다음과 같은 얘기까지 하였다. “수녀님은 너무 지독하다.” 라는 표현을 하였다. 안나 수녀는 그 정도로 의지가 아주 확고한 분이었다. 그래서예수의 안나 수녀는 내가 얘기하고 부탁한 거 하지 않으면은 순명으로 명하겠다고 사모님에게 말할 정도로 다그치셨다. 그녀는 사모님에게 맞서서 이렇게 말할 정도로 상당히 확고한 결단력이 있는 분이었다.

예수의 안나 수녀를 평가하자면은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물려받은 상속자가 되기 보다는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려고 했던 머리가 될려고 했다. 그래서 사모님은 말년에 안나 수녀에 대해서 야단도 좀 치고 하였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시복 절차에서 예수의 안나 수녀의 증언을 보면은 사모님과 상당히 깊은 친밀한 관계를 나누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사모님은 당신의 딸 수녀들 중에서 가장 소중히 존중하고 사랑했던 분으로 안나 수녀를 꼽았다. 안나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이런 얘기를 하였다. 어느 날 사모님과 함께 어느 수녀원에 있으면서 함께 한 방에서 자기도 하고, 마지막 몇 주를 보내면서 함께 산보도 하고 그렇게 보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안나 수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서 사부님이 엘 갈바리오 수도원에 있으면서 안나 수녀님이 원장으로 계셨던 베아스데 세구라 갈멜 수녀원에 매주 고해 성사를 주러 갔다. 사부님은 노새를 이용하거나 걸어서 그렇게 먼 거리를 갔다는 것은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부님은 예수의 안나 수녀가 원장으로 있었던 베아스 수녀들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챙겼다.

안나 수녀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물려 받은 상속자로서 사모님께서 당신 딸들에게 원하셨던 것을 구현하고 옹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당시 초창기에 이러한 정신을 잘 몰랐던 개혁 가르멜 수사들, 장상들의 견해를 거슬러서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그 당시 총장이었던 도리안 신부는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잘못 조치를 했다. 안나 수녀는 도리안 신부의 권위를 거슬러서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보호하고자 했다.

예수의 안나 수녀가 한 업적 중에 하나는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와 그라시안 신부와 더불어서 그 당시에 교황이셨던 식스토 5세 교황으로부터 맨발 가르멜 수녀들의 회헌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서를 하나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좀 복잡한 문제이지만, 이런 조치를 통해서 사모님의 유산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이 때 예수의 안나 수녀와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 그라시안 신부가 가르멜 회헌이 변경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로마에 청원했던 Breve 라고 하는 교서를 도리안 총장 신부님를 비롯해서 Consulta(총평의회)에 허락을 청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로마에 청원하여 교서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반역자로 몰리면서 박해를 받는 빌미를 받았다.

당시 두 분의 수녀님과 그라시안 신부님는 이 교서를 청하면서 사실상 중요한 세 가지 사안을 방어하고자 했다. 첫째는 그들이 교서를 통해서 옹호하고자 했던 것 중에 하나는 Consulta(총평의회)와 연관이 있다. 이 Consulta는 총장 신부와 4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5명이 이 수녀들의 사안에 개입하지 말고, 오직 한 명의 대표자만이 수녀들의 삶에 개입하도록 조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하였다. 그 당시 수녀들이 이 조치를 취하고자 하면서 의도했던 바는 수녀들의 사안에 관련해서 5명의 총평의회 위원들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대표만이 수녀들의 삶에 개입하도록 원했다. 수녀들이 원했던 한 명의 대표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 아니면 그라시안 신부였다. 그런데 만일 수녀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 두 분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이 대표가 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을 잘 보지 못하였다.

둘째, 이 교서를 통해서 수녀들이 방어하고자 했던 사안은 공동체 원장 수녀의 재선과 관련된 것이다. 1581년 알칼라 회헌에서는 원장 수녀가 다시 재선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요즈음 마라비야스 가르멜 수녀원 처럼 수십 년 동안 원장 수녀로 재선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을 방어하고자 했다. 성녀 데레사 시절에 적지 않은 수녀원에서 원장 수녀들이 계속해서 재선하고 삼선하는 상황이 많았다. 어떤 수녀님들은 일생 동안 원장을 하기도 하였다.

셋째, 이 교서를 통해서 방어하고자 했던 사안은 원장 수녀는 공동체에 수녀님들이 원하는 만큼 누구든지 고해 신부님을 청할 수 있고 그런 고해 신부를 초대할 수 있는 권한을 방어하였다. 기존의 가르멜 수도회의 Consulta에서는 한 분이나 두 분 정도만이 한 공동체에 고해 신부를 둘 수 있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이 교서에서는 수녀들이 원하는 고해 신부이면 누구든지 둘 수 있고 또 청할 수 있다. 그래서 원장 수녀는 모든 공동체 수녀를 위해서 그런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을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당시 초기 개혁 가르멜 수사님들이 새로운 회헌을 통해서 원장 수녀님들이 가졌던 권한 중 상당한 부분을 배제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거기에 맞서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님, 예수의 안나 수녀님 그리고 이분을 지지했던 그라시안 신부님 이 분들이 원장 수녀님의 권한을 보호하고자 노력했고, 그 조처가 바로 로마에 이러한 일련의 권한을 보호하려는 어떤 그 교서를 받고자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예수의 안나 수녀가 맨발 가르멜 수녀원이 유럽 전체 확장된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안나 수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 지역(지금의 벨기에)에 맨발 가르멜 수녀원이 확장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안나 수녀가 하였던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마드리드 가르멜 수녀원 창립이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석학이셨던 살라망카 대학 교수인 레온의 루이스 수사 신부와 함께 협력하시면서 사모님의 작품을 1588년 살라망카에서 처음으로 출간하였다.

3. 바르톨로메오 안나 수녀

1) 생애

성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는 1549년 똘레도 주에 속하는 알멘드라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0살 때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셨다. 안나 수녀는 어린 시절에 양들을 치는 여자 목동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안나 수녀는 아주 단순하였고, 친절하였으며 애덕이 많았다. 특히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데 아주 적극적이었다.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는 1570년 성 요셉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하였을 당시 가대수녀가 아닌 노동수녀였다. 그녀가 입회하기 이전에는 가르멜 수녀회에서는 가대수녀와 노동수녀 이러한 구분이 없었다. 개혁 가르멜 수도회에서 안나 수녀를 노동수녀로 입회를 시키면서 노동수녀와 가대수녀라고 하는 이런 계층이 생기게 되었다.

노동수녀에 대한 문제는 바르톨로메오 안나 수녀가 프랑스로 진출하게 됐을 때 원장이 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그 당시 노동수녀는 흰수건을 썼다. 하지만 흰수건을 쓴 노동 수녀가 원장이 되는 게 그 당시에는 맞지가 않았다. 그래서 안나 수녀는 검은 수건을 쓰게되면서 자연스럽게 원장 수녀의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처음부터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님가 가대수녀(검은 수건)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안나 수녀는 남들보다 낮고 비천한 상태에 있기를 바라였다. 그래서 사모님의 이러한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노동수녀(흰 수건)가 되었다. 안나 수녀는 읽고 쓰는 것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그녀는 당신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서 스스로 비천한자로 남고자 했다. 그런데 안나 수녀가 프랑스로 창립을 가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가 원장이 되려고 흰수건을 벗고 검은 수건을 쓰고자 했을 때, 예수의 안나 수녀님가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를 비판하였다. 만약 자매가 검은 수건을 쓰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맨발 가르멜 수녀회가 완화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어떻게 보면 좀 엄격한 분이지만, 융통성이 없는 이었다.

안나 수녀님의 위상이 맨발의 가르멜 수도회에서 높아지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1577년 이후였다. 1577년 이후부터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는 사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약 5년 동안 그림자처럼 늘 동반였다. 1577년에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팔이 부러졌다. 사모님이 팔이 부러진 이후부터 안나 수녀는 사모님의 아주 가까운 동반자이자 간호 수녀였으며, 사모님의 여러 가지 문서 같은 것을 대필하는 비서 역할을 하였다. 그녀는 사모님으로부터 글을 나중에 배웠기 때문에 글쓰는 것을 아주 못하였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가 말하시기를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가 글을 배운것은 정말 기적이라고 하였다.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는 아주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집필하였다. 한 권은 안나 수녀의 서간집이고, 또 다른 작품은 상당히 중요한데, 안나 수녀는 이 작품 안에서 주로 드러나는 것은 우리 수도회 개혁에 기원에 대한 것과 사모님의 일련의 창립활동에 대해서 다루고 있으며, 데레사적 정신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다.

안나 수녀가 사모님의 마지막 시기에 대해서 전한 글들은 상당히 중요하다. 그녀는 사모님의 마지막 창립지인 부르고스에서부터 알바 데 또르메스를 향한 여정 당시의 사모님의 상태와 사모님이 앓았던 병에 대해서 서술한 글, 그리고 사모님의 알바 데 또르메스 수녀원에서의 마지막 임종 모습을 아주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사모님은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님의 품 안에서 1582년 10월 4일에 임종하였다.

2) 작품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는 당신의 생애에 대한 자서전을 썼다. 이것은 두 가지 판본이 있다. 안나 수녀가 쓴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사모 데레사의 마지막 시기』, 『마지막 여러 해들』, 『사모 성녀 데레사의 유해를 이전하는 문서』, 『사모님의 시복 과정에 대한 진술』,『데레사 가르멜의 시작에 대한 소식들』, 『프랑스에서의 데레사 가르멜의 기원에 대한 소식들』, 『사모님의 정신에 대한 대화들』 특히 이 책은 그라시안 신부님이 주해를 하였다. 그리고 『데레사적 유산에 대한 옹호』라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가 쓴 작품들이다. 이 마지막 작품인 『Defensa de la herencia Teresiana』(데레사적 유산에 대한 옹호)와 안나 수녀의 서간 665편이 함께 수록되어서 출판되었다.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가 저술한 작품은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안나 수녀는 당신이 본 것(사모님, 초기 개혁 가르멜 수도회)을 직접 목격한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신의 작품들을 깊이 성찰하고 썼다. 그래서 목격 증인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이것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생애에 대한 목격 증인일 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회 초창기 역사에 대한 산 증인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3) 일련의 사건들

① 예수의 성녀 데레사 시신을 안치할 장소 논쟁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의 생애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한 가지가 있다. 사모님이 1582년에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임종하고 몇 달 후에 시신이 아빌라로 이송이 된다. 그런데 알바 데 또르메스의 두케 공작에 의해서 성청에 의뢰가 들어가서 결국 사모님의 시신이 그로부터 몇 달 후에 다시 알바 데 또르메스 수녀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시신을 소유할 권리는 엄밀하게 말하면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에 있다.

사모님의 시신을 간직할 수 있는 권리가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에 있는 이유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무엇보다도 먼저 아빌라의 성 요셉 수녀원의 원장이었고, 그라시안 신부님이 관구장 시절에 사모님이 어디서 돌아가시든 간에 그 유해는 성 요셉 수녀원에 모신다 라고 문서를 쓰고 당신이 직접 서명을 하였다. 그 증인이 바로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이다.

사모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유해를 어디에 안치할까 하는 문제로 알바 데 또르메스 측과 아빌라 측에서 일련의 힘겨운 소송이 있었다. 결국 이 소송에서 그 알바 데 또르메스 측에서 승소를 하게 된다. 이 소송과 관련해서 일련의 아주 복잡한 문서들이 전해져 오고, 상당히 드라마틱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은 그 당시에 일어났던 일들은 좋지 않은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래서 몰래 기사가 와서 사모님의 유해를 푸대에 담아 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팔을 짤라 가기도 하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알바 데 또레스 측에서 시신을 안치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② 베릴 추기경과의 갈등

바르톨로메오 의 안나 수녀는 예수의 안나 수녀와 더불어서 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으로 창립을 떠났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서 상당히 많은 고초를 겪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왜냐하면은 프랑스 갈멜이 창립된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프랑스 영성 학파의 거장 베릴 추기경이다. 베릴 추기경이 이 가르멜 수녀들을 초청하고 나서 나중에 쫓아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는 많은 고초를 겪게된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 가르멜은 베릴 추기경의 어떤 정신 하에 유지가 된다. 그래서 프랑스 가르멜은 베릴적인 색채를 띄게 됩니다.

따라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프랑스 가르멜 창립 당시에 겪었던 고초 중에 하나는 베릴 추기경에 의해서 맨발 가르멜이 프랑스에 도입는 데 있어서 베릴 추기경은 사모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배격했다는 것이다. “베릴 추기경은 내가 얘기하는게 바로 갈멜 정신이다.” 라고 하면서 사모님의 목격 증인이자 사모님과 늘 함께 하였던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폄하하였다. 베릴 추기경은 공동체 앞에서 당신(바르톨로메오 안나 수녀)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프랑스의 정신을 잘 모른다고 하면서, 공동체 내에서의 바로톨로메 오의 안나 수녀가 개입하는 모든 것을 차단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상당히 고초를 겪었다.

③ 예수의 안나 수녀와의 갈등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겪게 되는 또 다른 고초는 예수의 안나 수녀와의 갈등이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상당히 조직적이고 친밀하였다. 그래서 이 수녀가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의 여러 가지의 일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앞서 살펴 보았던 Veil(베일) 문제이다. 노동 수녀였던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원장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노동 수녀가 원장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흰 수건에서 검은 수건을 쓰고자 했을 때 예수의 안나 수녀는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를 폄하했다. 두 수녀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게 된 또 다른 문제는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그 당시에 지원자 중에 캘빈니스트 집안의 딸을 수녀원에 입회시키고자 했는데, 이것을 예수의 안나 수녀가 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이로 인해서 바로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이 문제를 로마의 총본부에 문의를 하게 된다. 그래서 총본부에서는 회헌의 정신에 따라서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 허용을 하게 된다. 하지만 예수의 안나 수녀는 여전히 배척을 했다. 예수의 안나 수녀는 회헌과 우리 수도회의 전통에 따라 볼 때는 이단의 자녀를 수녀원에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다라고 하면서 계속 걸고 넘어졌다. 이 사건을 봐서도 예수의 안나 수녀는 상당히 엄격하고 융통성이 좀 없는 분이었다.

그 당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이 문제(이단 집안의 자녀를 입회시키는 것)에 대해서 예수의 안나 수녀와 했던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사모님 시절에도 가르멜 수녀원에 이스라엘 사람들(유다인들)을 수녀원에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사모님의 정신은 가르멜 수녀원은 어떤 출신에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단이 막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단들을 구원해 내는 것 중요하였다. 그래서 사모님의 정신에 따르면은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예수의 안나 수녀보다 더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영혼이었다.

④ 고해 신부에 관한 원장 수녀의 권한

성 요셉의 마리아 수녀와 예수의 안나 수녀, 그라시안 신부는 가르멜 수녀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문서를 로마에 청원을 했다. 그런데 그 당시 총장이었던 도리안 신부와 Consulta(평의원)들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청했다. 반면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순명의 덕 입장에서 봤을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고해 사제와 관련해서 원장 수녀의 권한에 대해서 잠시 언급하도록 한다. 사모님이 1581년 회헌(알칼라 총회)에서 가르멜 수녀들의 회헌에 원장 수녀들은 공동체 수녀들이 원하는데로 고해 사제들을 둘 수 있고, 그런 고해 사제를 준비해야 될 의무와 권리가 있다라고 회헌에서 정하였다. 그런데 사모님은 생애 말년에 이렇게 조치한 사실과 사안에 대해서 후회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은 많은 고해 사제들이 공동체에 출입을 하게 되면은 어떤 수녀는 이 신부님께 다른 수녀는 저 신부님께 고해 성사를 보고 면담을 하다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갈등을 빚게 되고 대립하게 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어떤 신부님은 인기가 있어서 더 자주 와서 많은 수녀님들에게 성사를 주게 되면서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현상이 있었다. 이런 일련의 현상을 봤을 때 사모님은 나중에 후회하셨고, 바르톨로메의 안나 수녀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사모님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쓴 편지 중에 많은 고해 사제들을 둠으로 인해서 일어나게 되는 폐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역사가들 중에서 이 편지는 위조된 것이고 날조된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래서 상당히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는데, 최근에 문헌 고증에 의하면 이 편지는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님의 친필 편지라고 밝혀졌다. 이러한 그 바르톨로메 안나 수녀님의 견해는 사모님과 같은 입장이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확정이 됐다.

⑤ 그라시안 신부를 비판

바로톨로메오의 안나 수녀는 도리안 신부를 많이 옹호하고 또 칭찬하면서, 그라시안 신부를 비판했다. 두 가지 이유로 그라시안 신부를 비판하는데 있어서 나름대로 합당한 근거가 있다. 사모님의 생애 말년에 그라시안 신부와 애정적으로 좀 멀어졌다.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의 증언에 따르면, 사모님이 그라시안 신부가 원래의 개혁 정신에서부터 조금씩 소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모님도 그라시안 신부로부터 조금 멀어지는 상황이다고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증언하였다. 그런 반면에 도리안 신부에 대해서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칭찬한 것은 좀 과장된 면이 있다.

⑥ 사모님의 유해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가 현시 체험 중에 사모님의 유해가 아빌라로 되돌아가는 그런 걸 보았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그것은 실현이 되지 않았다. 근데 이건 단지 바르톨로메오의 안나 수녀의 바램이었다. 만약에 알바 데 또르메스에서 사모님의 유해를 가져다 도둑질해다가 아빌라에 갔다고 놓는다면 알바 데 또르메스의 주민들이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일화가 또 하나가 있다. “성년의 가르멜회”라고 하는 가르멜 수도회의 가족 수도회 1982년에 알바 데 또르메스로 소풍을 갔는데, 그 당시에 교황님과 추기경, 어느 추기경님께서 알바 데 또르메스를 방문하였다. 하지만 교황님과 추기경님이 알바 데 또르메스에 간 이유는 사모님의 유해를 몰래 빼내오기 위해서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 당시 알바 데 또르메스 주민들은 그걸 막기 위해서 자동차들을 알바 데 또르메스의 강에 자신들의 승용차를 집어 던지고 난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최근에 알바 데 또르메스 갈멜 수녀들은 수녀원을 개보수 하였다. 더불어서 사모님의 유해가 안치되어있는 관은 수녀원 성당에서 볼 때 2층에 안치되어 있다. 거기가 사모님이 돌아가신 장소이다. 예전에는 봉쇄 구역이었기 때문에 수녀님들만 보았고 외부 사람들은 보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순례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밑에서부터 올라가서 거기까지 들어가서 사모님의 관이 있는데 가서 묵상할 수도 있고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놨다. 수녀원 박물관에는 사모님의 심장과 팔 등이 안치되어 있다. 어쨌거나 수녀원의 봉쇄 구역을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아주 교묘하게 그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잘 배려를 해 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