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레사적 카리스마의 기원과 발전(11)






4. 도리안 신부

도리안 신부는 개혁 가르멜의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자, 동시에 언제나 논쟁의 중심에 있던 분이었다. 이 논쟁은 도리안 신부의 인품, 인물 됨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해석의 문제와도 연관이 된다. 많은 가르멜 수녀들과 수사님들은 도리안 신부님에 대해서 대부분 전해 내려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르멜 수도회 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가지 전승에 바탕을 두고 이 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도리안 신부가 쓴 작품을 바탕으로 해서 접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도리안 신부의 작품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인물됨과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생애

도리안 신부는 1539년에 이태리 제노바 공화국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상인이라기 보다는 은행가 집안이다. 나중에 그의 가족들은 유럽 제일의 도시이면서 남구 항구 도시인 세비야에서 살게된다. 그 당시 세비야에는 신대륙에서 유입되어 들어오는 수많은 금은보화가 유입돼 들어왔다. 따라서 이 도시에는 유럽의 많은 은행가들이 여기에 와서 많은 재화를 금·은으로 바꿔갔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은행가 집안이었던 도리안 신부의 가족 역시 여기에 와서 정착하고 살고 활동을 했다.

도리안 신부는 젊은 시절에 은행원으로써 활동을 하였다. 어느 순간 그는 은행원으로서 사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껴서, 당신이 가졌던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를 하고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도리안 신부는 스페인 남부에서 신학 공부를 하시고 1576년에 서품을 받았다. 그는 회심한 다음에 1577년에 세비야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해서 양성을 받고 그 이듬해에 서원을 받고나서 갈멜 수도자로서 성장하게 된다. 당시 세비야는 창립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2) 활동 및 업적

도리안 신부는 세비야 가르멜 수도원의 부원장(Vicario)을 하였고, 빠스뜨라나 수도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581년에는 원가르멜(OCam) 수도회의 총장이신 카파르도 신부에 의해서 그 당시 관구 제1참사되었다. 그는 이렇게 다양하게 가르멜 수도회 내에서 행정직을 맡아서 하였다. 또한 도리안 신부가 한 업적 중에, 중요한 일은 완화 가르멜의 여러 관구들 사이에서 개혁 가르멜 관구가 독립되는 것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개혁 가르멜 관구가 스페인 내에 여러 다른 완화 가르멜 관구와는 독자성을 갖고 오직 로마 총 본부의 직속하에서 통치되도록 조치를 하였다.

그래서 도리안 신부는 1585년에 개혁 가르멜의 제2대 관구장에 선출되었다. 관구장으로 선출된 이후에 그는 그 당시 스페인의 왕인 펠리페 2세로부터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완전히 독립된 수도회로 승격될 수 있도록 승인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개혁 가르멜 관구는 1581년에 원가르멜로부터 독립 관구로 승격되었고, 1587년에 수도회(Congregacion)로 승격이 되었고, 몇 년 후에 Orden 수도회로 더 독립된 수도회로 점차 완화 가르멜 수도회와 분리되어 가는 수순을 밟게 되는데 도리안 신부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나서 1593년에 개혁 가르멜 수도회가 원가르멜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었고 완전한 독립 수도회로서 자리잡게 되면서 Ordo 수도회가 되었다. 이때가 도리안 신부님가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총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일련의 독립과정의 수순을 밟게된다. 여기에는 도리안 신부의 탁월한 행정 관리 능력이 아주 중요했다.

1594년에 알칼라 총회에서 도리안 신부가 교회법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알칼라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여행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결국에는 총장으로서의 직책을 받지 못하였다. 도리안 신부가 2대 관구장으로 선임되고, 1585년부터 총장으로 선임되었던 1594년까지 약 9년 기간 동안에 42개의 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초창기부터 1593년까지 약56개의 수도원이 창립이 되는데요, 그 중에 42개 수도원이 도리안 신부가통치하던 기간에 창립이 되었다. 그러니까 도리안 신부가 통치때 대부분의 초창기 수도원이 설립이 되었다. 그정도로 그는 아주 많은 활동을 하였다.

3) 도리안 신부의 카리스마

도리안 신부가 데레사적 카리스마의 발전에 기여한 부분 중에 한 가지는 개혁 가르멜 수도회 삶의 전반적인 것을 아주 엄격함의 틀 안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개혁적인 성향은 자신의 여러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도리안 신부가 지향했던 “엄격함”이라고 하는 개혁적인 마인드는 사실 개혁 가르멜 수도회만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의 대다수의 개혁적인 성향을 가졌던 여러 수도회들이 지향했던 정신이 바로 이 “엄격함”의 정신이었다. 그래서 이 “엄격함”이라고 하는 것 또는 “맨발”이라고 하는 개념 역시 개혁 수도회들이 지향했던 표징들이었다.

도리안 신부님이 지향했던 이 엄격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회헌에 대한 어떤 철저한 준수를 지향하고있다. 그래서 수도원에 장상은 공동체 회원들이 얼마나 이 회헌을 잘 따르고 있는지 늘 경계해서 지켜보고 그런 파수꾼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장상은 공동체 회원들이 엄격함을 철저히 따르기 위해서 회헌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파수꾼처럼 잘 경계해서 회원들을 독려하는 것이 바로 장상의 임무라고 보았다.

5. 예수 마리아의 알론소 신부

예수 마리아의 알론소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 3대, 5대 총장이었다. 이 신부는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창기에 도리안 신부의 개혁적인 스타일을 수도회 내에 완전히 정착시켰다. 그래서 성녀 데레사의 개혁적인 스타일과는 다른 은수자적인 중심의 성향을 개혁 가르멜 수도회에 정착시킴으로써 가르멜 수도회가 도리안적인 스타일의 개혁 성향이 주류로 들어서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 마리아의 알론소 신부는 자신의 재임 시절에 초창기에 ‘가르멜 수도자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정체성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약간의 사도직만 수행하는 거의 지극히 관상적인 수도자가 우리 개혁 가르멜 수도자가 지향하는 모습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은수자적이고 관상적인 가르멜 수도자의 전형이 오늘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사실상 우리 수도회의 지배적인 성향이었다.


6장. 오늘날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을까?


이 장에서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현재를 배경으로 사모 성녀 데레사가 교회에 전해주신 당신의 카리스마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구현해 낼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성찰한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설립한 남자 가르멜 수도회가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참 흐뭇해 하셨다. 그래서 종종 남자 가르멜 수도자들을무엇보다도 “Carmelitas Descalzos”(맨발 가르멜) 라고 부르곤 하였다. 만일 오늘날 일부의 역사가들처럼 데레사 가르멜이라고 부르는 것을 사모님이 들었다면 상당히 좀 언잖아 하셨을 것이다. 사모님의 개혁적인 성향은 “Carmelitas Descalzos”(맨발 가르멜)이라고 하는 두 마디 안에 집약되어 드러나고 있다. 맨발 가르멜 남·녀 수도회(Carmelitas Descalzos y Carmelitas Descalzas)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우리 수도회 명칭이다. 이전에도 지금도 전혀 변경않은 우리 수도회의 공식적인 이름이다.

사모님은 초창기 개혁 가르멜 수도회의 초창기 세 명의 수사들인 두루엘로 수도원의 십자가의 성 요한, 안토니오, 에레디아 신부들은 그곳에서 했던 과도한 고행에 대해서 상당히 언잖아 하였다. 그래서 사모님은 나중에 그들에게 교정을 좀 청하였다. 어쨌거나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과도한 수덕적인 차원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모님이 개혁 가르멜 수사들을 보면서 불만족스러워했던 부분 중에 하나는 초창기 수사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아주 언잖아 하셨습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신지 않고 돌밭길이나 눈 길을 걸어다니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은 너무 엄격해서 가르멜 수도 성소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모님은 아주 좋은 품성을 갖추었거나, 인품과 학식을 갖춘 좋은 인재들이 이러한 엄격한 수도회에 들어오기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수사들이 맨발로 다니는거 원치 않았다.

『창립사』 23장 12절에 보면은 사모님의 강한 어조가 담긴 글이 있다. 여기에서 사모님은 혹시 수사들 사이에서 개혁을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면서 후회하였고 한다. 개혁을 사실 그 수사님들 사이에서만 했어야 되는건 아닌가 후회하시면서 염려 섞인 어조로 당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글을 쓸 당시는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의 첫 번째 창립지인 두루엘로 수도원을 창립하고 약 8년 후인 1576년에 쓴 글이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의 창립 및 개혁에 대해서는 상당히 만족하였다. 그런데 사모님은 1576년 즈음해서 수사들의 개혁에 대해서는 일시적으로나마 낙담하시고 좀 후회를 하였다. 그 중에 하나는 그 당시 원가르멜(OCam)과 완화 가르멜이 충돌하면서 많이 고통을 받았다는 점도 작용을 했다. 왜냐하면 가르멜 수사들의 개혁에 있어서 상당히 문제가 됐던 것이 바로 원가르멜 수사들과 맨발 가르멜 수사들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 당시 최고 책임자였던 루베오 총장 신부의 의지를 거슬러서 배반을 했던것이 맨발 가르멜 수도회였다. 그래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 수사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십자가의 성 요한이 그러했기 때문에 납치되어서 똘레도 수도원 감옥에서 옥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맨발 가르멜 수사들이 총장님의 의지를 거슬러서 배반했다라고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불순명이다. 그 당시 총장 신부님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에 조건부 창립을 허락을 했다. 그것은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 같은 경우에는 스페인의 중부 지방인 까스띠야 지방에만 창립을 허락을 하였다. 그런데 총장 신부님의 뜻을 거슬러서 까쓰띠야 지방 밖에서도 창립을 했다. 특히 남부지방인 안달루시아 지방에도 창립을 했다.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는 수도회 통치권자의 뜻을 거슬러서 불순명을 했기 때문에 원가르멜 신부들이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를 박해했던 주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원 가르멜 입장에서는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의 박해의 중요한 원인으로 불순명이었지만, 맨발 가르멜 수사들 입장에서는 불순명이 아니고 충분한 어떤 근거를 갖고 창립을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가들은 통상 그 당시의 상황을 “관할권의 충돌”이라고 단정지어서 말하고 있다. 그 당시에 맨발 가르멜 수도회가 창립을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었는데, 총장님의 허락을 통해서 창립을 할 수가 있었고, 지역 교회의 주교님의 허락을 통해서 창립을 할 수가 있었다. 더나아가 사도 순시자, 교황 시찰자, 교황 대사의 허락을 통해서도 창립이 가능했다. 그러니까 맨발 가르멜 수도회는 관할권 내에 창립 허락을 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여러 고위 성직자들을 통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창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총장님에 대한 불순명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총장님 이외에도 창립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경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것을 “관할권의 충돌”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의 기원과 관련해서 가장 큰 문제는 개혁을 주도 했던 두 인물인 그라시안 신부와 도리안 신부 사이에 분열이다. 바로 이것이 초창기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개혁 역사에 가장 큰 문제로 불거지게 된다. 그러나 그라시안 신부와 도리안 신부 사이에 분열에도 불구하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 초창기 개혁의 역사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남녀 개혁 가르멜 수도회 모두가 교회에서 더욱 성장했고, 더 큰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그래서 맨발 가르멜 수도회는 교회의 역사 안에서 오히려 원 가르멜보다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약간은 과장되긴 하지만 나무가 자라서 가지를 뻗는데, 그 가지가 오히려 나무 기둥보다 더 커져서 가지가 나무 기둥 자체를 먹어버린 그런 형국이 됐다. 이것이 지금의 원 가르멜과 맨발 가르멜 사이의 위상이다.

초창기 맨발 가르멜 수도회 역사와 관련해서 보게 되는 문제 중에 하나가 성소자 식별 문제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상당히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을 갖고 성소자들의 인품이나 자질에 대해서 보았다. 그래서 그녀는 맨발 가르멜 수녀원의 이상에 맞는 성소자를 잘 선별하였다. 그런 반면에 남자 가르멜 같은 경우에는 성소자들의 출신이 매우 다양하였다. 예를 들어서 은수자 출신 회원, 사제 출신, 신학교수, 철학교수,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완전 문맹자도 있었다. 또 본당 신부 활동을 하다가 수도회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초창기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회의 성소자들을 구성하였다.

역사적으로 맨발 가르멜이 더욱 더 유명해지고 성공하게 된것은 무엇보다도 맨발 가르멜 수녀님의 역할이 아주 크다. 예를 들어서 그 당대 석학(살라망카 대학의 석좌교수)이셨던 아우구스티노 수두회의 레온의 루이스 수사님이 1588년 살라망카에서 사모님의 작품을 처음으로 출간을 하게 되었다. 그 작품의 시작 부분에 가르멜 수녀님들께 보내는 편지를 하나 실었다. 거기에서 그는 사모 성녀 데레사를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 중에 두 가지를 얘기하였다. 하나는 사모님이 남겨주신 작품을 통해서 사모 데레사를 직접 느낄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딸들인 수녀님들을 통해서 사모님의 정신을 볼 수 있다. 이러면서 당대 석학이셨던 레온의 루이스 신부님이 수녀님들을 극찬했다. 그래서 우리 수도회가 성공하게 된 것은 수녀님들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우리가 봐야 되는 문제는 소위 말하면 가르멜 영성학파라고 불리는 십자가의 성 요한과 성녀 데레사를 비롯해서 그 이외 많은 맨발 가르멜 수도회 성인 성녀들이 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는 17세기, 18세기에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신비신학자들이 가르멜 신비학파라고 불리는 그룹을 이루었다. 이런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카리스마를 오늘날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또한 우리가 함께 성찰해야 될 주제는 가르멜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교회 안에 전파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와 그 이후에 발전되는 카리스마들을 어떻게 설교를 통해서 전파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당면한 문제이자 어려움이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수덕적인 차원, 종교적인 차원을 비롯해서 근본적으로는 그리스도교적인 삶이 요청하는 전망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데레사적 카리스마를 전파하는 어려움도 이 맥락 안에 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교적인 삶과 복음이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바탕으로, 사모님과 사부님의 카리스마를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를 봐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비롯해서 우리 가르멜의 신비가들이 우리에게 전수해주는 영적인 보화인 “하느님과의 변모적인 합일을 이루는 것”은 정말 소중한 보물이다. 이것을 오늘날 어떻게 전해줄 수 있는 가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신론적인 사회, 세속화된 사회, 그리스도교를 거스르는 사회, 가톨릭 교회를 거스르는 그런 사회적인 맥락 안에 우리가 있다는 거에요. 따라서 이러한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회 속에서 과연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소중한 보화를 어떻게 전해 줄 수 있을까 이게 관건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너무 강하게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영적인 보화를 떠넘겨서도 안되고 또 그렇다고 너무 유보적이어서도 안 된다. 어떤 균형점을 유지하면서 이걸 전해줄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성찰해야 될 과제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 사부님, 사모님, 여러 성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수덕적인 차원, 복음적인 청빈, 사부님이 얘기하는 욕구를 잘 제어해서 하느님과의 변모적인 합일에 이르는 것, 사부님이 이야기한 Nada(無)라고 하는 것, Todo(全)에 이르기 위해서 완전히 철저한 자아 부정 등의 영적인 유산들을 어떻게 전해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즉, 더 이상 신앙, 성인들의 영적인 체험, 영적인 보화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물질만능 사회에서 어떻게 가르멜 수도회의 영적 보화를 전해줄 수 있는가는 다만 스페인의 문제, 또는 유럽의 문제, 남미의 문제, 또는 한국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완덕의 길』10장과 11장에서 사모님이 수덕적인 차원에서 이탈의 정신에서 이야기 하였다. 『완덕의 길』 10장 5절에서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매들은 단단한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여기에 온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으러 왔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의 정신을 우리는 『완덕의 길』 11장 2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의 육체는 한 가지 고질이 있어서 위해주면 위해줄수록 더욱 양냥거리게 마련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호강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아쉽다 싶은 기색만 보여도 - 별로 필요치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 가엾은 영혼을 속여서 앞으로 못 나아가게 만들어버립니다”.

『완덕의 길』 11장 5절에서도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하느님께 자신을 맡기십시오. 무엇이건 올 테면 오라지요. 죽은들 어떻습니까? 몸뚱이가 우리를 조롱한 것이 몇몇 번인데 우리들 한두 번쯤 그놈을 조롱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꼭 믿어주십시오. 이러한 결심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도우심을 입어 몇 번이고 이와같이 해 나가다보면 어느덧 우리는 육체의 지배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모님의 위의 말씀을 통해서 세상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대면해야하고, 맨발 가르멜 수도회의 영적인 유산을 전해줘야 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 이 영적인 유산을 전해주기에는 너무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사실 이 세속 안에 우리는 여전히 마이너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하듯이, 우리는 가르멜의 영적 유산 (예수의 성녀 데레사의 카리스마, 우리 성인들의 카리스마)을 끊임없이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맨발 가르멜 남·녀 수도회는 소수의 집단이지만, 아주 용기 백배한 훌륭한 집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사모님의 카리스마를 전합시다.